우리 어린 시절, 시골 읍·면 초등학교엔 미국에서 급식용으로 보내주던 밀가루와 옥수수가루가 나왔다. 어른들은 그것을 ‘사팔공 밀가루’, ‘사팔공 옥수수가루’라고 불렀다. 왜 ‘사팔공’이란 이름이 붙었냐면 당시 미국 어느 법의 480조가 잉여농산물의 처리에 대해 규정한 조항인데, 그 법 조항을 근거로 하여 ‘미국 시민이 우방국 국민에게 무상으로 원조하는 양곡’이기 때문에 ‘사팔공 밀가루’고 ‘사팔공 옥수수가루’라는 것이었다.
원조품임을 첫눈에 알아볼 수 있게 밀가루 포대와 옥수수가루 포대 한중간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진 팔뚝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무상으로 원조되는 양곡이므로 어떤 경우에도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씌어 있었다.
보다 예전엔 무상원조의 원칙에 따라 가난한 집에 그냥 나누어 주었는데, 어느 시기부터인가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방공사를 하고 제방을 쌓고 길을 닦을 때 품삯 대신 주었다.
내 기억으로 아마 제일 마지막까지 지급되었던 곳이 시골 학교였지 않나 싶다. 1970년대 초까지도 그걸로 점심시간마다 학교 관사에서 옥수수죽을 끓이거나 옥수수빵을 쪄서 점심을 못 싸오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미국에서 오는 것은 죽을 끓이거나 빵을 찔 옥수수가루뿐이어서 그걸 끓이거나 찔 나무는 아침 등교 때마다 급양 대상자들이 들고 갔는데, 그것 역시 어린 마음에 부끄럽기도 해 자칫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바로 그 시절, 대관령 아래 산골 소년이 5학년이 되던 해 어린이날에 난생 처음 강릉 시내 극장으로 영화를 보러갔다. 전날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일이 어린이날이라 학교에서 4, 5, 6학년만 시내 극장으로 영화구경을 가기로 했다. 집에 가서 아버지 어머니께 잘 말씀을 드려서 영화구경을 가고 싶은 사람은 내일 학교에 올 때 5원씩 가지고 오너라.”
마음으로는 모두 지금까지 그런 게 있다고 말로만 듣던 영화구경을 하고 싶었지만 5원도 시골 살림엔 적은 돈이 아니어서 몇몇 아이들은 가져오지 못했다. 그런 친구들은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 또 학년마다 담임 선생님이 어린이날 선물처럼 돈을 대신 내주었다.
오가는 걸음이 삼십리라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먹을 점심은 학교 관사에서 미리 단체로 옥수수빵을 쪄 준비했다. 그 옥수수빵이 바로 ‘미국 시민이 우방국 국민에게 무상으로 원조하는 사팔공 옥수수가루’로 찐 빵이었다.
영화구경을 떠나기 전, 우리는 시멘트 종이 봉지에 든 옥수수빵 하나씩을 받아들고 운동장에 열을 맞춰 서서 어린이날 행사도 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하는 어린이날 노래도 부르고, 어린이는 내일의 희망이며 이 나라의 기둥이라는 교장 선생님의 훈화도 듣고, 교감 선생님이 마이크를 잡고 읽는 ‘어린이헌장’도 들었다. 그 헌장엔 이런 조항도 있었다.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야 한다.”
정말 그때 그랬을까 하고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 어린 시절 어린이헌장엔 실제로 그런 구절들이 있었다. 현실과 맞지 않다고 고친 게 1980년대의 일이라고 했다.
그날 50이 넘었거나 50이 되어 가는 우리는 저마다 어린 시절 어린이날 추억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속도로 달라져 왔는가를 이야기했다.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히 더 할인하여 ‘단체 5원’ 하던 영화 값이 ‘단체 5000원’쯤으로 오른 물가상승도 놀랍지만, 그때와 지금의 식생활과 주거생활의 차이, 또 우리 삶 자체에 대한 인식 역시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그러면서 또 우리가 살아온 날만큼의 미래를 생각한다. 지금 저 아이들은 또 그만큼의 세월이 지난 다음 어떤 놀라움을 우리처럼 겪게 될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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