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금 100만달러, 매출의 11.3% 인세를 조건으로 미국 유명 출판사와 계약을 한 David Ann은 다름 아닌 1990년대 중후반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명강사로 이름을 떨친 안재찬(43) 박사다. 한국 이름은 안 된다는 출판사의 요청에 그의 실명이 아닌 급조된 영어 이름이 쓰이게 된 것.
올 9월 미국의 각 학교에서 쓰일 수학 교과서 원고 수정을 위해 출국을 앞둔 13일 그는 “똑똑한 아이들을 문제 풀이에만 급급한 기계로 전락시키는 우리나라 수학 교육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휴대전화 기술이 우리나라가 최고라고요? 핵심기술도 그런가요? 휴대전화 핵심기술은 삼각함수를 이용한 것이고, 인간의 비밀을 풀어낸다는 게놈 프로젝트 기초는 바로 수학의 4진법이에요. 병원에서 쓰이는 컴퓨터단층(CT) 촬영기기는 연립방정식 원리를 응용한 것이고요. 첨단 과학기술의 원천이 수학이라는 데는 누구나 동의하지만 우리가 수학을 그렇게 가르치고 있나요?”
검정고시로 대학에 들어간 그는 서울대 영문학과 81학번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감옥 생활을 한 경력 때문에 미국 스탠퍼드대 입학 허가서를 받고도 비자가 나오지 않아 영국행을 택했던 그는 경제학을 공부하던 중 수학에 매료돼 프랑스 파리 제7대학에서 해석기학 박사학위를 땄다.
귀국 후인 95년 그가 밥벌이로 시작한 일이 바로 학원강사. 영문학을 공부했다는 사실이 걸림돌로 작용해 동료 수학 강사들의 비아냥을 들었던 그였지만, 결근한 동료 강사 대신 딱 한시간짜리 고3 서울대 입시반 수업을 맡은 것을 계기로 그의 삶은 변화를 맞았다.
여러 수학 이론의 탄생 배경과 더불어 유도 미사일과 전자교란장치 등의 첨단 무기체계에 수학이 적용된 사례를 들어가며 펼친 그의 이색 강의에 학생들은 기립박수를 쳤고 그 이후 그는 1200여명의 학생을 가르쳐 2년 동안 30억원을 벌었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97년 돌연 학원 문을 닫고 전 재산을 쏟아부어 세계 각국의 수학 교육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디스켓 1만2400장, 120쪽짜리 책 1080권 분량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했다.
그 결과 초·중·고교 교육 과정 전편을 아우르는 424편의 수학책을 내놓기도 했다. 여러 공식을 앞세운 문제풀이 위주의 기존 수학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수학이 창의력을 길러준다고들 하죠. 문제풀이만으로 창의력이 발달하길 바랄 수 있을까요? 수학자가 이론을 만들게 된 계기와 오늘날 그 이론이 어떻게 첨단과학에 적용되고 있는지, 하나의 이론이 정립되기까지 수학자들이 벌인 치열한 논쟁의 쟁점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먼저 아는 게 순서죠. 수학이 재미있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가 내놓은 책은 학생보다 교사가 먼저 찾고 과학고, 외국어고, 민족사관고 등의 특목고에서 교재로 많이 쓰인다고 한다. 수학의 바이블이라는 ‘수학 정석’ 저자로 유명한 홍성대 박사가 설립한 전주 상산고 역시 그의 책을 찾았다.
오는 20일 개정을 거쳐 완간된 ‘수학 거미 시리즈’를 시중에 내놓을 예정이기도 한 그는 출판계에서는 이례적으로 2만권의 선주문을 받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수학 문제를 잘 푸는, 공부 잘한다는 아이들이 결국 기초과학 분야로 나가나요? 카이스트를 그만두고 수능 다시 봐서 의대나 한의대로 빠지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죠. 이런 식이면 이공계의 미래는 없는 것이고 우리나라 미래 또한 없는 겁니다.
앞으로 20년 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일지는 지금 수학 교육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김보은 기자 spice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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