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사명의 운명적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으며, 그것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선조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된다. 국난 조짐이 일면 그걸 타개할 위인도 동시에 출현하는 것인가.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그는 승군을 조직해 연전연승을 거둔다. 병법과 축지법 등에 능해 왜군들이 크게 두려워했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전후 1604년에는 협상대표로 선조의 친서를 갖고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난 뒤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귀국하는 것으로 소임을 마친다.
대사의 행적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한 토막을 소개하면 이렇다. 임진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명당은 일본 승려에게 자신의 버선을 벗어 머리에 씌워준다. 조선의 ‘발 아래 존재’란 뜻에서다. 오늘날 일본 승려들의 모자가 한국 버선처럼 생긴 것은 우연일까. 사명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 남정네들을 거세해 말린 불알 몇 가마니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남자의 ‘씨’가 부족해진 일본 여성들은 허리에 담요를 차고 다니며 씨 받기에 매진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기모노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사명대사 일행의 당시 일본 방문 모습을 담은 ‘사명대사행일본지도(泗溟大師行日本之圖)’가 충북 제천 신륵사 극락전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는 이때, 사명대사의 숭고한 뜻과 행적이 무거운 마음으로 다가온다.
조민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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