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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으로 본 性이야기]진주 명석면 신기리의 자웅석이 忠石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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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4-10-06 14:34:00 수정 : 2004-10-06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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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쌍의 남·여근석 난리때마다 울어 진주시를 찾아갔을 때 심하게 비가 내렸다. 오랜만에 오른 진주성은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유명한 촉석루는 공사 중이었고, 성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마침 남쪽에서는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도 있었다. 성 안 논개사당에서는 백열등 불빛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이런 진주에 대한 흐릿한 기억을 뒤로하고 신기리를 찾았다.
신기리는 진주시에서 서북쪽 산청으로 가다가 명석면 소재지인 관지리에서 나불천을 타고 오르면, 그 상류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기리가 속한 명석면의 명칭이 산촌에 가까운 이 끝자락 마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면 이름이 이 마을의 무엇 때문에 만들어진 것일까.
명석은 한자로 울명(鳴) 돌석(石), 한글로는 운돌이라는 뜻이다. 신기리에는 바로 이 우는 돌멩이가 있다. 그런데 이 돌이 바로 남·여근석을 상징하는 자웅석(雌雄石)으로 불린다. 과연 이들 돌에 어떤 사연이 있기에 하나의 전설로 자리잡은 것인지 자못 흥미롭다.
빗길을 달려 도착한 신기리의 명석각은 마치 사당처럼 층층으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 안에 있는 자웅석은 현재 경상남도 민속자료 12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계단을 올라 자웅석을 살펴보았다. 오른쪽 돌은 여성을 상징한다. 마치 족두리를 쓴 듯한 모습과 배가 불룩 나온 것이 영락없는 임신부로 보였다. 반면에 왼쪽 돌은 높이가 87㎝인데, 머리와 몸통의 연결부가 패어 있어 마치 귀두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돌로 본 듯하다.
그 앞에서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운좋게도 논에 물꼬를 터주기 위해 나선 정영표(71)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현재 명석각 보존위원이라 운돌의 유래나 각을 세운 그간의 과정 등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또한 명석각 앞에는 비석과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이러한 내용을 누구나 잘 알 수 있도록 했다. 안내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진주성을 정비하였다. 이때 공사를 끝내고 광제암으로 돌아가던 승려가 굴러오는 돌 한 쌍을 만났다. 승려는 돌에게 어디를 가느냐 묻자, 돌은 성쌓기에 고통을 겪는 백성을 도와주기 위해 성돌(城石)이 되고자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승려가 성을 축조하는 작업이 끝났다고 말했더니, 돌은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감복한 승려가 돌을 보국충석(輔國忠石)이라고 아홉 번 절을 올렸다. 그 후로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돌이 사흘 동안 운다고 하여 운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주민들은 이 돌을 모셔서 매년 음력 3월 3일에 동제(洞祭)를 지냈다.


그런데 정영표씨는 약간 다르게 설명하였다. 성을 쌓게 된 이유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범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승려가 돌을 향해 아홉 번 절을 하였기 때문에 그곳을 구배동(九拜洞)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 말은 원래의 자웅석이 구배동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1970년대에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사실도 이런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이처럼 전설의 시기는 제보자나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진주통지’에는 고려 공민왕이라고 하며, 명석각 앞의 비석에도 고려 공민왕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최근에 세워진 비석에는 아예 고려 고종 18년이라는 시기까지 명시되어 있다.
동아대학교에 있던 정상박 선생이 조사한 구전자료에는 임진왜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사정을 정 선생은 문헌설화가 시기를 명확하게 하고, 보다 윗대로 소급시키려는 성향 때문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동제는 원래 신기리만의 제의였다. 이들 자웅석은 따로 있었으며, 그 당시에는 마을 사람 중심의 마을제의였다. 그때는 이 돌들이 북쪽 방향의 각기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34년 전 이곳에 안치하면서 비를 맞지 말라는 의도로 각(閣)을 세웠다. 그리고 돌을 한자리에 모아두면서 면 단위 제의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3년 전에는 면장이 은행나무를 덕산에서 가져와 자웅석 받침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명석면의 명칭이 바로 이 마을의 자웅석에서 기인한 것과 무관치 않은 듯이 보인다. 정영표씨가 이 자웅석에 대해 언급하면서 보여준 강한 자부심은 그런 면을 엿보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이 돌을 보국충석이라고 강조하는 점도 그런 맥락을 담고 있다. 이 돌과 관련한 또 다른 전설들이 좋은 예라 하겠다.
즉 국가적으로 큰일이 생기면, 예컨대 전쟁이 나거나 하면 이 돌이 운다는 것이다. 1632년에 간행된 ‘진양지(晋陽誌)’에 명석리(鳴石里)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자웅석은 그런 의미로만 이해된 돌은 아니다. 자웅석이라는 말 그대로 암돌과 수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신앙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무엇보다도 암·수돌을 갖춰 조화를 꾀한 것은 우리의 신앙적 관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속성을 감추고 오히려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충성을 다하는 돌로 변화되었다. 안내판의 기록처럼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선돌이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운돌 이야기가 더욱 강조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현재 마을사람들이 자웅석보다는 보국충석으로만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왜 자웅석을 보국충석으로 해석한 것일까. 이것은 자웅석을 상스럽다고 생각한 당시 식자층의 시각과도 무관할 수 없다.
이 돌의 명칭을 보면 임진왜란을 거친 후에 만들어진, 국란을 극복한 자긍심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즉 임진왜란의 3대대첩 중 하나인 진주성대첩이 바로 좋은 예다. 김시민 장군 휘하 3800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왜군 3만명을 물리쳤다는 점은 이 지역의 주민들이 높은 애국심과 연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바위를 대상으로 기자(祈子)나 다산을 기원하던 기능은 사라졌다. 대신, 나라를 위해 운 돌이기 때문에 나라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면 단위의 제의로, 즉 자치단체가 주동이 된 제의로 탈바꿈한 것이다. 명석이라는 명칭이 이른 시기부터 정착된 것은 그런 면을 엿보는 데 도움을 준다. 자웅석을 맞춘 기본적인 이유는 음양의 조화를 꾀한 데 있다. 음양이 깨질 경우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으며, 사람들의 자식 농사도 온전할 수 없다. 음양이 맞아야 풍요로운 수확이 가능하다.
조선시대 때 한 고을에 과부나 홀아비가 많으면 수령이 문책을 받았다고 하는 기록들은 음양이 어느 정도 맞아야 농사도 잘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이처럼 조화를 꾀하려는 생각이 바로 우리의 전통이었다. 자웅석 역시 그런 출발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 민속연구과장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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