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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교수의 요재지이] <下> 섭소천-천녀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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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4-09-03 18:24:00 수정 : 2004-09-03 18: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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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과의 사랑…''해피엔딩''으로 소천은 곧바로 부엌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대신해 요리를 하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집에 살아왔던 사람처럼 안팎을 들락날락했다.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그녀를 무서워하여 무덤으로 돌아가 자라고 권고하면서 침대와 이부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소천은 어머니의 속내를 알아차리자 곧바로 물러나왔다.
영채신의 서재를 지날 때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물러서곤 하며 뭔가 무서운 일이나 있는 것처럼 문 밖에서만 뱅뱅 맴을 돌았다. 영채신이 소천을 보고 들어오라고 불렀더니 그녀는 “방안에 서린 칼의 기운이 사람을 섬뜩하게 만드는군요. 지난번 여행 중에 모습을 드러내어 당신을 뵙지 못한 것도 사실은 이 때문입니다”하고 말했다. 영채신은 그것이 가죽 주머니 때문임을 알고 떼어서 다른 방으로 옮겨 걸었다.
소천은 그제야 방안으로 들어와 등잔불 앞에 앉더니 한동안 아무 말도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밤에 글을 읽으십니까? 저는 어렸을 때 ‘능엄경(楞嚴經)’을 읽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거지반 잊어먹고 말았어요. 부탁드리건대 한 권만 구해 주시면 저녁에 틈나는 대로 오라버님께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영채신은 그러라고 허락했다.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앉아 있으면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영채신이 그만 떠나라고 재촉했더니, 그녀는 서글픈 표정이 되어 말했다.
“저는 타향에 떨어진 고혼(孤魂)인지라 황량한 무덤으로 돌아가기가 무서워서 그래요.”
“서재 안에 다른 사람이 잘 수 있는 침상이 없네. 게다가 오라비와 누이동생 사이라면 서로 미심쩍은 짓은 삼가야 하지 않겠나?”
영채신의 따끔한 말에 소천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양미간에 수심이 어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천천히 문 밖에 나서더니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영채신은 그녀가 불쌍해서 집안에 따로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어머니의 꾸지람이 두렵기도 하였다.
소천은 매일 새벽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고 대야에 세숫물을 받아 시중을 든 뒤 다른 방으로 물러가 집안일을 했는데, 어느 하나 어머니의 뜻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황혼 무렵이 되면 그녀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와 서재로 왔다. 그리고 등불을 밝히고 불경을 읽다가 영채신이 잠자리에 들려는 기색을 보이면 참담한 모습이 되어 물러가곤 하였다.
소천이 오기 전에는 영채신의 아내가 오랜 병으로 누워 있는 바람에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소천이 온 뒤부터 신세가 매우 편해졌으므로 어머니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몹시 기꺼워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 익숙해지다 보니 소천을 친자식처럼 사랑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그녀가 귀신이란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저녁에 그녀를 혼자 떠나가게 할 수가 없어 마침내는 자기와 한방에서 기거하게 하였다. 소천은 막 왔을 당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반년쯤 지나자 차츰 묽게 쑨 죽을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소천을 사랑하여 그녀가 귀신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위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래지 않아 영채신의 아내가 죽었다. 어머니는 소천을 며느리로 들일 마음이 있었지만 아들에게 이롭지 않을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소천은 어머니의 염려를 눈치 채고 틈을 보아 이렇게 아뢰었다.
“일년이 넘는 세월을 모셔왔으니 응당 저의 사람됨을 아실 것입니다. 무고한 나그네들을 해치고 싶지 않았던 까닭에 아드님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저에게 딴 생각은 없어요. 다만 영 공자께서 광명정대하시니 하늘과 사람의 흠모를 한몸에 받으실 것이므로 저는 그저 그분을 돕고 또 의탁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몇 년 뒤 제가 그 덕택에 봉고(封誥, 역주)를 받게 된다면 저승에서도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어머니도 소천에게 무슨 악의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손을 두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소천이 말했다.
“자녀는 오직 하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의 운명을 적은 장부에 아드님에게는 가문과 조상을 빛낼 아들이 셋이나 된다고 씌어 있으니, 귀신을 처로 삼았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녀의 말을 믿고 아들과 상의했다. 영채신은 매우 기뻐하면서 잔칫상을 차려놓고 친척들을 초대한 다음 그들에게 결혼을 알렸다. 어떤 사람이 신부를 보고 싶다고 말하자, 소천은 대담하게도 화려하게 단장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천을 쳐다보았는데, 그녀를 귀신이라고 의심하는 게 아니라 선녀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여 여러 친척들은 다들 예물을 보내와 축하 인사를 하면서 다투어 소천과 사귀려고 하였다. 소천은 난초와 매화를 잘 그려 매번 한 폭씩 답례로 선물했는데, 그림을 얻은 사람은 모두 보물처럼 간수하면서 영광으로 생각했다.
하루는 소천이 창문 앞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답답하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문득 영채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죽 주머니가 어디 있죠?”
“당신이 무서워하기에 잘 싸서 다른 곳에 감춰두었소.”
“저는 산 사람의 기운을 오랫동안 받아왔기 때문에 더 이상 그것이 무섭지 않아요. 꺼내다 침대맡에 걸어놓는 것이 좋겠어요.”
영채신이 무슨 말이냐고 이유를 캐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요 며칠 동안 줄곧 무섭고 불안하기만 할 뿐 마음속이 편치 않아요. 추측건대 금화(金華)의 요물이 제가 멀리 도망친 것을 원망하여 조만간 이곳으로 찾아올 것 같습니다.”
영채신이 가죽 주머니를 갖고 오자, 소천은 요모조모 자세히 뜯어본 다음 입을 열었다.
“이것은 검선(劍仙)이 사람 머리를 담았던 주머니예요. 이 정도로 해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지금 보아도 저는 오싹하고 소름이 끼치네요.”
그녀는 즉시 가죽 주머니를 침대 옆에 건사했고 다음날에는 영채신더러 다시 방문 앞으로 옮겨 걸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소천은 등불을 마주하고 앉아서 영채신에게 잠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별안간 어떤 물체가 공중에서 새처럼 떨어져 내리자, 소천은 놀라며 휘장 안으로 몸을 숨겼다. 영채신이 쳐다보니, 그 물체는 야차처럼 번들거리는 눈깔에 피처럼 새빨간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놈은 불꽃을 이글이글 내뿜고 이빨과 발톱을 휘두르면서 앞으로 돌진해 왔다. 방문 앞에 이르자 놈은 뒷걸음질치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가죽 주머니로 다가서더니 마치 잡아채 찢기라도 할 것처럼 손톱을 앞으로 뻗었다. 주머니는 갑자기 ‘쨍’ 소리를 내면서 광주리 두 개만 한 크기로 커졌다. 어리어리하는 사이 갑자기 어떤 귀신이 그 안에서 상반신을 내밀더니 야차를 잡아채서 주머니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이 조용해지더니 주머니 또한 원래의 크기로 오므라들었다. 영채신은 몹시 무서우면서도 신기했다. 소천도 밖으로 나와서는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재난은 없을 거예요!”
둘이 함께 주머니 속을 들여다보았더니, 맑은 물 몇 되가 고여 있을 뿐이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영채신은 과연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소천은 아들 하나를 낳았고, 영채신이 첩을 들인 뒤 그녀와 첩이 각기 하나씩을 더 낳았다. 세 아들은 모두 벼슬을 했고 명성도 높았다고 한다.
섭소천편 끝

■역주
봉고(封誥)=명·청의 제도상으로 일품에서 오품까지의 관리가 황제의 고명(誥命)을 받는 것을 ‘봉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남편이 벼슬길에 올라 아내가 받게 되는 고명을 말한다.


■지난 줄거리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영채신(寧采臣)이 금화로 여행을 갔다가 숙박비도 아낄 겸 인적 없고 고즈넉한 절에서 묵게 된다. 첫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영채신이 담장 너머로 넘겨다보니 중년 부인과 붉은 옷의 노파가 섭소천이란 아가씨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채신이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절세미인 섭소천이 방안으로 들어와 사랑을 나누자고 유혹하고 황금 한 덩어리까지 가져온다. 영채신은 이를 준엄히 꾸짖고 섭소천을 내쫓는다. 이 절의 다른 승방에서 타향 출신 서생과 그 하인이 차례로 죽자 섬서성 출신 서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연적하는 영채신에게 이들이 귀신에 홀려 죽었다고 말한다. 한밤중이 되자 영채신을 다시 찾아온 섭소천. 그는 영채신에게 목숨을 노리는 야차나 요괴에게서 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연적하와 같은 방에서 자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영채신은 다음날 연적하가 다른 곳으로 나갈까봐 새벽부터 쫓아가서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고 잠자리도 그의 방으로 옮겨 무사히 밤을 넘긴다. 연적하는 “잘 보관하면 악귀나 귀신을 물리칠 수 있다”며 전날 밤 악귀를 쫓은 가죽 주머니를 이별선물로 준다.
섭소천과 사전에 약속했던 대로 무덤에서 유골을 수습한 영채신. 고향으로 돌아와 서재 밖의 들판에 봉분을 만들어 섭소천의 유골을 묻은 뒤 제사를 지내자, 섭소천이 불현듯 영채신에게 나타나 “당신의 첩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겠다”고 말한다. 영채신의 어머니는 “귀신과 결혼하라고 할 수는 없다”고 일축하면서도, 오누이로 지내면서 시중을 들겠다는 간청을 받아들인다. 섭소천은 즉시 영채신의 처에게 인사하러 가려고 하지만, 어머니가 만류하자 단념한다.
한밭대 외국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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