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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조선사기장 후예 도고 헤이하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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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4-08-16 13:31:00 수정 : 2004-08-16 13: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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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와 말복을 일주일이나 지나고서도 참으로 무더운 날들이다. 최근 어느 방송의 아침뉴스에 흥미있는 내용 하나가 소개되었다. 경남 거제의 한 면 소재지에서 발견된 비석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세운 이 비석의 주인공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1848∼1934). 한때 그의 동상이 진해 해군사관학교 뒷산 언덕 위에 세워졌던 적도 있었다. 문제의 비석과 동상은 해방되던 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졌는데, 동상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비석은 잘 보존되어 지금껏 면사무소 창고 안에서 잘 쉬고 있었던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오늘날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역사인물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한다. 그가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서 각각 중국과 러시아라는 세계 강대국을 굴복시키고 승리함으로써 일본인들에게 불멸의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도고 헤이하치로는 참으로 얄궂은 운명의 장난처럼 다가오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 남쪽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서 태어났다. 사쓰마는 정유재란 때 왜군 총사령관이었던 시마쓰 요시히로의 권세로 지배되던 곳이다. 요시히로는 임란 때도 가토 군대의 장교로 조선을 유린했던 잔인한 무사이자 조선도자기 수집광이었다.
그의 이런 취미는 자연히 조선에서 수많은 사기장을 납치하여 사쓰마로 끌고 가 도자기 왕국을 꿈꾸게 했다. 그의 손에 끌려간 대표적인 사람이 ‘심수관’씨 일가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의 조상도 하동 옥종 혹은 남원 부근에서 그릇을 굽다 끌려간 조선사기장이었다.
조선사기장을 조상으로 둔 도고 헤이하치로는 조부대부터 변신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1863년 시마쓰번과 영국 함대 사이에서 일어난 사쓰에이전쟁 때 참전하면서부터 해군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또 일본 해군의 제1호 유학생이 되어 영국에서 항해술을 공부한 뒤 돌아와 일본해군의 엘리트로 성장했다.
청일전쟁 때는 서해해전에 참전하여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했다. 해군대학 교장을 거쳐 1905년 러일전쟁을 치렀다. 누가 봐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러시아 발틱함대와의 생사를 건 전투를 그가 총지휘했다.
시산마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그의 지휘를 받은 일본 연합함대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괴멸시킴으로써 세계전사에 새로운 기록을 올렸다. 그는 일약 일본 최고의 영웅이 되었다. 1905년 10월23일 그는 연합함대 해산 및 개선함대를 일본왕이 사열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는 성대한 자리에서 유명한 고별훈시를 했다. 그는 일본이 왜 한국을 그토록 멸시하는지를 짐작케 하는 중대한 발언을 했다.(그의 연술문은 ‘平凡社’에서 간행한 ‘도고 헤이하치로전집’ 제1권에 실려있음) 연설문의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 신공황후께서 삼한(三韓)을 정벌하신 이래 일본은 400여년 동안 한국을 통치하였으나 한 번 해군이 무너지자 곧바로 한국을 잃었고 ….”
그런 지 5년 뒤에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는데, 그의 연설이 역사적 정당성을 제공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그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고 했다. 아무튼 그가 러시아 함대를 격파한 ‘적의 대형을 丁자로 가로지른 전술’은 영국과 프랑스 해군에도 도입되었고, 그는 해군군령부장, 백작, 오아의 군사고문을 거쳐, 1914∼1924년 히로히토 왕의 교육을 담당한 최고의 실력자에 올라섰다.
일제 시대 내내 한국을 강력하게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조선사기장의 후예인 그는, 일본 외무장관으로서 태평양전쟁에 한국인을 강제동원시킨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1882∼1950)와 같은 집안이었다.
친일문제는 감정적 대응보다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기가 더 어렵고, 또 중요하다.
정 동 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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