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책의 세상은 달라져있다. 종류가 다양해졌을 뿐더러 하루 출간되는 책만 해도 200종이 넘는다. 작가의 지명도, 출판사 브랜드만으로 경쟁력을 얻기 힘들다. 독자들 눈에 더 쉽게 들어오느냐에 따라 책의 판매부수는 전혀 다른 길을 달려간다. 이제 디자인은 책을 선택할 때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물론 여기에도 대전제는 있다. 책의 디자인이 부실한 텍스트를 대신해 줄 수는 없다는 것. 한층 성숙해진 북 디자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이제 북 디자인이란 개념은 책의 겉표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90년대 들어 본문의 레이아웃, 활자의 모양에서부터 종이 종류와 인쇄방법에 이르기까지 북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고 있다. 책이 비일상적인 세계만 담았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일상적인 것들까지 책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학·인문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요리법을 소개한 글, 여행지의 기록 등 내용이 다양해지면서 점차적으로 책 안에 색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디자이너와의 조율이 필요해졌다.
디지털 바람도 디자인 변화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편집 과정이 디지털화되면서 기술적 제약을 덜 받게됐다. 일일이 활자를 만들어 편집을 해야했던 수고를 컴퓨터가 덜어주었기에 본문 안에까지 디자인이 들어 설 여유가 생겼다. 특히 책 표지의 두께뿐 아니라 책의 크기까지 조절이 가능해져 더 이상 국화빵을 찍어내듯 일정한 모양의 책을 만들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문자 시대의 쇠락을 막기 위한 책의 몸부림은 더 치열해졌다. 똑같은 정보를 지니고 있지만 모니터 대신 종이를 선택하도록,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야했다. 디자인은 이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할 하나의 공정단계로 접어들었다.
자연스레 출판사에 디자인팀이 생기기 시작했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북 디자이너들도 많아졌다. 국내 최초의 북 디자이너 정병규씨를 시작으로 ▲신경숙의 ‘외딴방’ ‘깊은 슬픔’으로 책 표지에 획기적인 변화를 일으킨 서기흔 ▲‘아라비안나이트’, ‘김성동 문학전집’, ‘이건희 에세이’ 등을 맡은 홍동원 ▲서정주의 ‘미당 시전집’, 고은의 ‘화엄경’,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등을 디자인한 박상순씨가 그 뒤를 이었다.
지금은 춘추전국시대로 돌입해 강찬규 김은희 김진 민진기 안지미 오진경 오필민 이선희 이승욱 조혁준씨 등이 북 디자이너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으며 디자인붐 씨오디 아르떼가 디자인 전문 회사로 자리잡고 있다.
북 디자인도 문학·인문, 실용·생활, 경제·경영, 어린이 책으로 나뉘며 장르에 따라 디자인 방식도 조금 다르다. 문학의 겉표지는 북 디자이너들의 개성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책 안에 삽입된 사진이나 그림들이 없기 때문에 책에 대한 이미지를 전달하는 표지를 만들 때 온전히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전집일 경우에는 일의 부담이 더 많아진다. 전집은 이미 작가의 지명도가 따라붙기 때문에 그 작가의 색까지 드러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북 디자이너들이 텍스트를 다 읽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텍스트에 푹 빠져버릴 경우 객관적인 디자인을 하기 어려워지기에 독서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끝난다.
북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북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민음사 편집주간을 맡고 있는 박상순씨는 ‘정확과 매력’을 꼽는다. 텍스트의 이미지를 그대로 담아내는 정확성과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을 수 있는 매력이 얼마만큼 조화를 이루어내느냐가 관건이라는 것. 전자가 편집자의 요구에 따른 것이라면 후자는 디자이너의 욕심인 셈이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편집자와 의견을 맞추고 나면 인쇄업자와의 의견이 조율돼야 하기 때문에 타협점을 찾는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텍스트는 북 디자이너 손에 보름 정도 머물다가 책 한권으로 탄생한다. 사진, 삽화가 많아 본문까지 관여하게되면 6개월 이상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이미 세간에 알려진 책이라면 디자인은 오히려 쉬워진다. 일정 수준만 맞추면 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지명도도 없고 출판사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경우 디자인은 가장 민감한 부분으로 작용하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책이라도 절판이 되면 디자인도 따라 사라지게 된다. 늘 책 한권을 끝내고 나면 판매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배경이 베이지색이면 잘 팔리더라, 싼 종이를 쓰면 안 되더라 하는 우스갯소리가 있긴 하지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디자인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신 독자들에게 새롭게 다가서기 위한 노력은 늦추지 않는다. 최근엔 디자인을 접촉의 영역에까지 확대해 평면인 표지에 금박, 은박을 입히기도 하고 광택을 일정부분 주어 감촉의 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오랫동안 책을 간직하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책 표지를 두껍게 만든 양장본도 유행이다. 대신 책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벼운 종이를 쓰기도 하고 표지갈이를 통해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책들도 많아지고 있다.
광고계처럼 화려하지도, 거액의 보수가 뒤따르는 것도 아니고 대신 신경써야 할 부분은 많은 북 디자인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0여년 동안 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안지미(33)씨는 “일회성이 아닌 사람들의 서고에 영원히 간직된다는 것”을 매력으로 꼽았다. “그냥 종이에 인쇄된 텍스트가 책의 꼴을 갖추게 되면 그 가치가 확연히 달라지잖아요. 책에 숨결을 불어넣는다고 할까요. 그 맛 때문에 계속 일을 하게 되요.”
출판에서 북 디자인이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올라온 만큼 걷어내야 할 그림자도 있다. 디자인의 과잉 현상이 그것.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책들도 북 디자이너 손에 맡겨져 책값에 부담을 주고 있다. 또 책이 그 격에 맞게 디자인돼야하는데도 이 책 저 책 모두 예쁜 표지를 고집하고 있다. 성형수술 붐처럼 표지도 “○○책처럼 해 주세요”란 주문이 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디자인이 제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북 디자이너와 함께 출판사 또한 디자인에 대한 새로운 마인드가 필요하다.
디자인은 장식이 아니라는 것. 겉표지에만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본문 디자인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또한 몇몇의 북 디자이너로 몰리는 쏠림 현상과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대신 기존의 디자인에 집착하는 것도 해결해나가야 할 과제다.
윤성정기자/ys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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