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흔한 기업명이나 상점 간판, 안내 표지판을 보면 우리 사회의 국어 경시 풍조를 확인할 수 있다. 기업들이 점차 영어로 회사명을 바꾸는가 하면 국적불명의 명패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현상은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현실이다.
사례를 보자. 대한민국 유수의 기업들이 ‘마늘 냄새’나는 명패 위에 ‘버터’를 잔뜩 바르고 있다. 포항제철이 POSCO로, 국민은행이 KB로, 케이티가 KT로 이름을 바꿨다. 이는 곧바로 국어 관련 단체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2002년 11월 당시 한글학회는 우리말 이름을 버리고 영어 이름을 쓴 국민은행과 KT를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두 기업이 한글 이름을 버림으로써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어 우리말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정신적 타격을 입혔다는 것이 소송의 알맹이다.
이런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업들의 ‘이름’ 변경은 그칠 줄 모른다. 지난해 코스닥 등록 기업 가운데 회사 명패를 달리한 경우를 살펴 보자. 한국통신하이텔이 케이티하이텔로, 미창이 엠씨타운으로, 그루아이티에스는 GNT WORKS로 상호를 바꿔 달았다. 이에 앞서 1999년 말에서 2000년 초 코스닥시장이 호황일 때 회사명을 영어로 바꾸는 기업에 외국인 투자자금이 몰려들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고, 결국 상호명 변경 붐이일기도 했다.
이 뿐 아니라 세계화와는 무관한 우리 주위의 가게 이름에도 외래어 투성이다. 삼성카드가 지난해 8월 말 기준 명동 등 서울 중구의 카드 가맹점 상호명 2000여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상호명이 외래어인 업체가 전체의 53.1%나 차지했다. 특히 10대가 많이 찾는 의류나 잡화업종의 외래어 상호 비중은 67%를 차지할 정도로 심각했다.
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적어서 외국어의 느낌을 주는 경우나 우리말과 외국어를 혼용한 말이나 상표도 적지 않다. 모드니에(모든이의), 유니나(윤이 나), 나드리(나들이), 타미나(탐이 나), 누네띠네(눈에 띄네), 있다리아(이탈리아) 등등…. 이 가운데는 어법과는 무관하게 세인들의 눈길을 끌어 고부가가치 상표로 연결된 경우도 있다.
이와 함께 표기법도 문제다. 김치찌게는 김치찌개로 표기해야 맞다. 배터리 밧데리, 디지털 디지탈 디지틀, 데이타 데이터 등 지금 와서 표기법이 다르다고 해서 간판을 바꿔 달게 할 수 있는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와중에 한글학회의 ‘아름다운 우리말 가게 이름’ 선정 사업은 우리말을 가꿔 나가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섬마을 밀밭집, 솔내음, 하늘과 땅사이,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씨앗을 뿌리는 사람, 맑은 바닷가의 나루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돌실나이, 소꼴 베러 가는 날 등 정겹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넘쳐난다.
이밖에 만두벌판, 놀랄 만두하군(만두점), 뼈대있는 집(뼈다귀 해장국 전문점), 갈비생각(갈비 전문점), 광어생각(횟집), 의기양양(양곱창점), 아파트 파는 남자(공인중개사) 등 의미가 분명한 재치있는 우리말 상호가 늘고 있는 것도 고무적이다.
그렇다면 이노무스키(스키장비대여점), 떡도날드(떡+맥도날드) 등은 어떻게 봐야 할까.
여기서 어법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을 발전시킬 대책은 어떻게 흘러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에 대해 문화관광부 국어정책과 유병한 과장은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시행령에서 한글맞춤법, 국어로마자 표기법, 외래어표기법에 따라 한글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외국어를 쓸 때는 한글과 함께 쓸 것을 규정하고 있다”며 “하지만 벌칙조항이 없어 민간에 강행할 수 없는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처벌보다는 우리말을 적극 활용하려는 국민들의 인식을 높이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신동주기자/ranger@segye.com
<기고> ''국적불명 현수막''이 언어생활 혼란 주범
이병규 국립국어연구원 학예연구사
어디를 가든 쉽게 눈에 띄는 것이 간판, 각종 표지판, 안내판, 현수막이다.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매우 제한된 공간에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압축해 사람들의 시선을 한번에 사로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더구나 그 기능상 특징 때문에 어떤 종류의 글보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게 된다. |
그러니만큼 국민들의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사람들이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다. 소도시든, 대도시든 가릴 것 없이 거리에 나가 간판들을 보자. 골목골목마다 KT(케이티), KB(케이비), KTF(케이티에프), KT&G(케이티앤드지), LG(엘지), TG(티지), SK(에스케이), KCC(케이시시)라고 쓰인 간판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마천루의 꼭대기에, 아주 멀리서도 한눈에 선명하게 볼 수 있을 만큼 웅장하게 내걸린 그 모습에 위압감마저 느끼게 된다. 한술 더 떠서 이젠 Let’s KT(레츠 케이티), Have a good time KTF(해브 어 굿 타임 케이티에프)란다. 어느 나라 공기업인지 모르겠다. 표지판이나 현수막은 어떠한가. 적힌 표현이 어법에 맞지 않거나 뜻이 불분명해 국민들의 언어생활에 혼란을 낳고 우리말의 질서를 어지럽힌다. 안녕히 가십시요(→안녕히 가십시오), 어서 오십시요(→어서 오십시오)라고 적힌 표지판에서부터 노상적치물엄단(→길거리에 물건을 쌓아 두지 마시오), 안전의식개혁(→안전 의식 고취)이라는 공사 현장의 표지판까지….
나아가 Gangwon-do(강원도)를 Kang-won-do나 Gangwon Province로 적어 놓은 도로 표지판, 동굴 내의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금연과 오물투기 행위는 하지 맙시다(→동굴 안의 환경이 깨끗이 유지될 수 있도록 담배를 피우지 마시고 쓰레기도 버리지 맙시다), 내가 좋아 가는 산에, 내가 먼저 산불 조심(→내가 좋아 가는 산, 내가 먼저 산불 조심)이라고 국내 최대 국립공원 안에 버젓이 내걸린 현수막도 있다.
용암동굴(熔岩洞窟)이 형성된 후 천정(天井)이 붕괴(崩壞)되고 낙반(落磐)됨으로써 생긴 현무암(玄武巖) 괴(塊)이다(→용암 동굴의 천장이 무너져 생긴 현무암 덩어리이다)라고 설명한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 동굴이라고 자랑하는 유명 관광지의 안내판까지 모두 볼썽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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