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는 15세기 이전 이 땅을 다스린 거대한 가나제국을 기린 이름이다. 1890년대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57년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땅덩어리는 한반도보다 약간 큰 23만8000㎢. 인구 약 1900만명으로 공용어로는 영어를 쓴다. 북쪽의 부르키나파소에서 발원한 볼타강이 가나 동부지역을 적시며 기니아만으로 흘러든다. 이 강줄기를 막아 볼타댐을 건설하면서 세계 최대의 인공호인 볼타호가 만들어졌다. 풍부한 삼림자원과 코코아, 금 다이아몬드 등 광산자원, 그리고 황금해안의 대서양연안이 어장으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황금해안. 그 이름이 함축하듯 이 지역은 옛부터 금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1471년 바다를 누비며 해외시장을 개척하던 포르투갈의 황실 탐사대는 앙코브라계곡과 볼타강 사이에 있는 황금의 땅을 발견했다. 처음 그들은 원주민과의 물물교환으로 금을 얻어갔다. 뒤이어 이곳 ''미나(보물창고.寶庫)''를 남에게 뺏기지 않으려고 요새를 건설했다. 석공과 목수 기술자 탐사대와 군인 등 수백명을 파견해 웅장한 성을 지은 것이다. 1482년 엘미나에 세워진 이 요새는 아프리카 최초의 서양식 성채였다. 이를 시작으로 가나의 해변에는 300년 동안 자그마치 70여개의 요새와 성이 세워졌다. 네덜란드와 영국 덴마크 포르투갈 스웨덴 프랑스 등 각국이 해변 곳곳에 세운 이들 요새는 ''골드러시''의 상징이었고 노예경제가 번창하던 시절에는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다.
테마에서 엘미나 요새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가까이 걸렸다.
하얗게 빛나는 요새는 대서양을 끼고 서 있었다. 부근 작은 강변에는 고기잡이용 목선들이 줄지어 서있고 길가는 물건을 사고 파는 현지인들로 붐비고 있었다.
요새 옆으로는 3m정도의 깊은 도랑이 있다. 예전에는 이곳에 물이 가득 채워져 외적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노예무역이 가장 성했던 18세기 황금해안에서 수출된 흑인노예는 약 67만여명. 노예무역이 시작된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치면 100만이 넘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전역을 합하면 자그마치 1000만 가까운 흑인들이 유럽과 미국, 중미로 끌려갔다.
"팔려가는 흑인 노예들은 화장실이나 세면장도 없는 데서 몇달씩 갇혀 지냈다. 견디다 못해 반항하는 이는 따로 가둬놓고 물과 음식조차 주지 않았다. 혹독한 매질로 주검이 되기 일쑤였다."
어둠침침한 감옥 등 요새를 돌며 흑인 안내인 에 듀 하임은 취재진을 포함한 여행객들에게 이곳의 그늘진 역사를 소개했다.
이곳 백인들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실상 노예생활과 다름없었다.
"백인들은 신변의 안전 때문에 내륙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었고 대부분 성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말라리아와 황열병 수면병으로 몇년 안돼 죽는 이도 부지기수였다."
요새 안에는 백인 여성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성에 굶주린 그들은 흑인 여성들과 수시로 성관계를 가졌다.
이 때문에 해안지대 요새 주변에는 혼혈아가 많았다. 흑인 여성들은 백인의 아이를 배면 낯선 땅에 끌려가지 않고 노예의 신분을 벗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에 주인의 ''간택''을 기다렸다. 이들은 아이를 낳으면 존이나 벤다이크 같은 유럽식 이름을 붙이고 요새 부근 마을에서 남다른 우월감을 갖고 살았다.
어이없지만 요새 안, 흑인들을 짐승처럼 가둬놓고 노예로 수출하던 본거지 한 복판에는 카톨릭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이 ''거룩한 교회''는 노예무역이 성해지자 아예 상설 ''노예시장''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한동안 학교로 쓰이다 지금은 그 부끄러운 역사를 증언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노예수출의 본거지와 성당. 어울릴 수 없는 둘이 한 곳에 있으니 이 얼마나 처연한 아이러니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저마다 독실한 양 내세우는 신앙이란 얼마나 거짓이 많은 것인가. 회칠한 삶과 신앙이 어찌 이뿐이랴. 몇세기에 걸쳐 노예무역이 번창하는 동안 유럽에서 이를 문제삼은 기독교인은 드물었다. 오히려 그들 대다수는 노예 소유를 당연한 특권처럼 여기며 지냈다. 이야말로 종교인의 삶이 얼마나 타성적이고 허울에 찬 것이었는가를 일깨우는 산증거일 것이다.
/차준영기자 jycha@sgt.co.kr
<가나 태권도 보급 주역 곽기옥 사범>
가나에는 1976년부터 태권도가 보급됐다. 수산업을 하던 당시 김복남 한인회장이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에서 활동하던 김성범 사범을 초빙해 테마해군기지에서 해군장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도록 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어 1978년 곽기옥 사범(55) 등이 한국정부에 의해 파견됐다. 곽사범은 10년간 가나 국방부에서 육사 생도와 장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고 1993년 이후 정부 파견이 끝난 뒤에도 민간인으로서 계속 태권도 보급에 힘써왔다. 태권도 공인 8단으로 ''태권도의 모든 것(1984)''이라는 책을 낸 그는 현재 테마시에서 코리아나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다음은 곽씨와의 일문일답.
-가나에는 태권도가 얼마나 보급됐나.
▲군인 경찰 등 수만명이 훈련해왔고 유단자만 1만5000명쯤 배출됐다.
-군경을 많이 지도해온 배경은.
▲초기부터 이곳 대통령과 군 장성들이 태권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여기 오자마자 몇달간 정글 전투병 훈련소에 파견돼 몸이 쇠약해졌는데 어느날 갑자기 군 장성들 앞에서 격파 시범을 해야 했다. 처음 빈혈증세로 주저앉았다 다시 내달으며 격파시범을 했더니 장군들이 단상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더라. 대통령이 태권도를 국방 체육으로 가르치도록 지시해 군사훈련의 필수과목으로 자리잡았다.
곽씨는 한인사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해결사 노릇을 많이 했다. 태권도를 배운 제자들이 군경에 두루 포진해 있다보니 공항 등에서 신변에 문제가 생긴 한인들의 고충을 어렵잖게 해결해주곤 했던 것이다.
한때 옥수수 농장을 하다 실패한 뒤 식당, 페인트 사업 등으로 기반을 잡아 1998년부터는 호텔을 운영하고 있다.
부인 문현숙(53)씨는 1981년부터 15년간 한글학교 교장으로 교민 자녀교육에 힘써왔다.
/차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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