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소 포기 땐 부실수사 오명
“이러지도 저러지도…” 난감 검찰이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무죄 선고에 대한 항소를 놓고 고심 중이다. 원칙대로라면 항소를 하는 게 마땅하지만 원 전 원장 수사를 하면서 검찰 내부가 망가진 데다 굳이 항소를 해서 국정원과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검찰 수뇌부의 속셈이다. 항소를 하더라도 1심의 논리의 깰 수 있느냐는 현실론도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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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11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2012년 대선 때 공직선거법 위반과 관련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
검찰이 지난해 원 전 원장을 상대로 벌인 ‘국정원 댓글’ 수사는 검찰 입장에서 보면 악몽과 같은 일이다. 우선 수사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채동욱 당시 검찰총장은 정권과 갈등을 일으켰다가 갑자기 ‘혼외아들’ 의혹이 불거지면서 낙마했다. 세간에서는 채 전 총장의 혼외아들 의혹 제기가 국정원 댓글 수사에 대한 보복성 조치라는 분석이 나돌았다.
게다가 윤석열 수사팀장은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 수사 축소를 위한 외압을 행사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국정감사장에서 폭로해 조 지검장이 옷을 벗고 윤 팀장은 중징계를 받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외압의 몸통으로 지목되며 야당으로부터 사퇴압력을 받았다.
검찰이 원 전 원장 선고에 대해 항소를 할 경우 다시 한번 조직이 만신창이가 될 각오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검찰이 항소 계획을 곧바로 밝히는 다른 사건과 달리 “다음 주 금요일(19일)까지인 항소 기간 내에 고민하고 결정하겠다”고만 언급한 것은 그만큼 고민이 깊다는 반증이다.
검찰은 원 전 원장에 대해 부실수사를 했다는 오명을 쓸지언정 현 정권의 정통성을 정면에서 부정할 수도 있는 공소유지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심 재판부가 원 전 원장에게 적용한 법리를 두고서 법률가들의 시각은 엇갈린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국정원이 댓글로 선전하던 국정홍보 내용이 대선을 앞두고 ‘선거쟁점’이 됐다는 사정만으로 국정원의 댓글 활동이 선거운동이 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취지의 판단을 피력했다. 국정원이 평소에 국정홍보를 위해 달던 댓글 내용이 주요한 대선을 앞두고 주요 선거쟁점이 되어 특정 후보를 지지 혹은 반대하는 댓글로 읽힌다고 하더라도 이는 선거라는 우연적 사정이 개입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지적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댓글 활동을 선거 개입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 일각에서는 “선거를 앞두고는 국정 현안이 모두 선거 쟁점이 되는데, 국정원의 국정 홍보 댓글은 결국 여당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 “금년에 잘못 싸우면 국정원이 없어지는 거야”와 같은 원 전 원장의 발언이 있었는데도 1심 재판부가 이를 무시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원 전 원장이 선거 개입을 하라고 명확히 지시한 흔적이 없는 마당에 평소에 하던 댓글 활동만 갖고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란 반론도 나오고 있다.
또 원 전 원장이 “전 직원들이 선거 과정에서 물의를 야기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원 전 원장에 대한 1심 무죄 판단이 향후 정보기관의 선거 개입에 대한 면죄부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든다”고 말했다.
박현준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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