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성추행 의혹에 휘말린 청와대 윤창중 전 대변인은 8일(현지시간) 경찰 제지 없이 공항에서 표를 끊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년 전 스트로스칸 총재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미국 국적의 21살 인턴 여성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신고된 상태였다.
미 워싱턴 경찰당국은 9일 윤 전 대변인 사건을 수사 중이라고만 밝힐 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아 강제조치를 취하지 않은 이유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윤 전 대변인이 한·미 정상회담을 위한 일행에 속한 만큼 면책특권이 주어지는 외교관 신분에 준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에서 성추행이나 성폭행에 대한 처벌은 엄격하다. 가해자가 해외로 떠났다고 해서 경찰 수사가 유야무야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법률 전문가 등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미국 모두 범죄 관할권에 대해 속인주의와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번 성추문 의혹이 미국에서 미 국적자를 대상으로 한 사건이지만 우리 수사당국도 수사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미 경찰이 수사에 착수한 경우 한국 경찰이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고 한다. 미 경찰이 수사과정에서 협조를 요청하면 돕는 방식이 통상적이다. 한·미 양국 사이에는 범죄인인도조약이 체결돼 있을 뿐만 아니라 수사과정에서 수시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 경찰이 한국에 윤 전 대변인 신병을 넘겨주도록 요구할지는 사안의 경중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윤 전 대변인이 성추행을 부인하는 상황이나 폭언 및 폭행, 신체적 접촉, 성폭행 시도 여부 등에 따라 범죄 경중이 달라진다. 현재 미국 경찰이 작성한 ‘사건보고서’에는 윤 전 대변인이 “허락 없이 (피해 여성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는 진술 내용이 적혀 있다. 당초 성추행 의혹을 처음 폭로한 ‘미시USA’사이트에서는 피해 여성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을 싣기도 했다. 윤 전 대변인은 신체적 접촉만 인정할 뿐 성추행 의혹은 부인하는 상황이다. ‘사건보고서’에 현장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고 적혀 있는 만큼 정확한 진상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기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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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 경찰국이 작성한 윤창중 전 대변인 성추행 관련 신고접수 보고서. 사건 제목은 ‘성적 학대(SEX ABUSE)’(위쪽 빨간 네모), 피해자 진술내용에는 ‘허락 없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GRABBED HER BUTTOCKS WITHOUT HER PERMISSION)’고 기록돼 있다. 워싱턴=연합뉴스 |
법무부 등에 따르면 범죄인 인도법상 인도 대상 범죄는 ‘대한민국과 청구국의 법률에 따라 사형, 무기징역, 무기금고, 장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경우의 범죄’(6조)를 뜻한다. 윤 전 대변인 관련 의혹은 기본적으로 성범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인도 대상 범죄가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수사 결과 벌금에서 징역 1년 미만의 비교적 가벼운 경범죄(misdemeanor)로 판단될 경우 범죄인 인도를 청구할 수 없다. 현재까지 알려진 의혹만 놓고 보자면 윤 전 대변인이 범죄인 인도 대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우리 형법상 성인 대상 성범죄가 아직은 친고죄라는 점도 변수다. 피해자 고소가 있어야 기소할 수 있고 양측이 합의할 경우 수사 자체를 못할 수도 있다. 성범죄 친고죄 조항이 다음달 19일부터 폐지되지만 형벌 불소급원칙에 따라 윤 전 대변인은 해당 사항이 없다. 법무부 관계자는 “지금 단계는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인 것 같다”며 “아직까지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요청도 온 게 없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윤 전 대변인이 민간인 신분으로 미국으로 자진 출국해 조사를 받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 법조계 인사는 “윤씨가 혼자 한국으로 온 건 수행원 신분으로 당장 조사를 받는 상황은 피하자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윤씨가 차후 자진 출국해 조사를 받는 방안이 형사 사법절차로 보나 외교적으로 보나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모 기자,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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