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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공산당 상왕 장쩌민, 파워 지속될까

입력 : 2012-11-15 17:15:50 수정 : 2012-11-15 17: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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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현대 중국의 '영원한 실력자'인가.

지난 8일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차 당대회) 개막식에서 3세대 최고 지도자였던 장 전 주석은 여전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올해 86세인 그는 당대회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에 이어 두 번째로 회의장에 입장해 주석단의 맨 앞자리 중앙에 앉았다. 그의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장 전 주석은 당권을 기준으로 하면 13년 동안(1989~2002년) 최고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 2005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러난 시점으로 치자면 3년이 더 늘어모두 16년에 이른다.

하지만 최고지도자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막후 실력자로 행세해온 그는 7년이 지난 현시점에서도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상왕'으로 비쳐지고 있다.

시진핑 시대 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7명 가운데 위정성(兪正聲) 상하이(上海) 서기, 장더장(張德江) 충칭(重慶) 서기, 장가오리(張高麗) 톈진(天津) 서기 등 3명은 아예 장쩌민의 인맥으로 분류된다.

장 전 주석이 시진핑호의 '최대주주'라는 분석까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사건 직후인 6월 13기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13기4중전회)에서 실력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지로 당총서기에 올랐다.

이어 1990년 4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1993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국가주석에 각각 오르면서 당(黨)·정(政)·군(軍)을 모두 장악한 제1인자가 됐다. 중국 공산당 역사상 당·정·군을 동시에 장악한 인물은 창업자인 마오쩌둥(毛澤東) 이후 그가 처음이다.

장 전 주석은 1926년 8월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의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1947년 상하이(上海) 자오퉁(交通)대학 전기학과를 졸업했으며 대학시절인 1946년 공산당에 입당해 학생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졸업후 미국인 경영회사와 상하이시에 근무하다가 1955년 모스크바의 스탈린자동차 공장을 1년간 견학하고 귀국한 뒤 자동차, 전기, 전자공업 분야에서 일했다.

그가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의 집권으로 개혁파가 득세하면서 부터다.

1980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부주임, 1982년 전자공업부 제1부부장을 거쳐 부장이 됨으로써 정부 각료의 반열에 올랐다.

1982년 당중앙위원에 선출된데 이어 1985년 상하이시장 겸 서기로 임명됨으로써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7년 13차 당대회에서 당정치국원에 올랐다.

그는 상하이에서 개혁·개방정책을 과감히 추진하면서도 사회주의체제와 조화를 이루는 경제발전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 전 주석은 이처럼 상하이를 기반으로 정치적 역량을 키워왔으며 중국의 주요 정치세력인 '상하이방'의 거두가 됐다.

그는 특히 상하이시 서기로 있을 당시 톈안먼 시위사태가 상하이로 번지기 시작하자 시위에 동조적이던 언론인을 해임시키고 시위 주동자를 처벌하는 등 단호히 대응함으로써 덩샤오핑의 눈에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전 주석은 박학다식할 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서예 등에도 조예가 깊어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학식이 높고 교양있는 지식인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장 전 주석이 시진핑 시대에 계속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후진타오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라는 '2선 권력'을 화끈하게 내려놓은 마당에 그 앞세대인 장 전 주석이 기득권을 주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 정치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원로정치'라는 지적도 장쩌민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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