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택일이 더 위험한 사고
중국에서 아빠의 아이 교육방식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몽둥이로 자녀 넷 가운데 세 명이나 명문 베이징대에 보낸 늑대(狼) 아빠에 이어 이번에는 눈높이 교육으로 아이를 천재로 키워낸 전업 ‘보부’(보모에 빗댄 신조어)가 등장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선전에서 아이를 수학 천재로 키워낸 라오하오옌(饒浩雁)이다. 올해 13살 아들인 자딩(家鼎)은 자신의 또래보다 4∼5년 빠른 고교 2년에 재학하고 있으며 베이징대와 칭화대 수학과에 진학할 자격을 따냈다. 피아노 등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다고 한다. 경화시보(京華時報)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자녀의 자율적 의사를 중시하는 라오하오옌의 자녀교육 방식이 주목받는다고 보도했다. 그는 아이의 놀라운 기억력과 수학적 재능을 발견하고는 캐나다에서 운영하던 금융투자업까지 포기하고 2005년 귀국해 아이 교육에 전념했다고 한다. 라오하오옌은 “늑대 아빠의 교육방식에 동의할 수 없다”면서 “아이에게 어떤 행위도 금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예컨대 아이에게 콜라의 나쁜 점을 알려준 후 자발적으로 마시지 않도록 한다는 얘기다. 자딩도 “아빠가 나에게 준 영향은 매우 크다”면서 “산책을 할 때에도 항상 나에게 문학과 역사에 관해 얘기해준다”고 말했다. 늑대 아빠라 불리는 광둥성의 사업가 샤오바이유(蕭百佑·47)는 전혀 딴판이다. 그는 지난 6월 초 ‘몽둥이가 천재를 만든다’는 철학과 자녀교육 경험을 담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최근까지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정도로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샤오바이유는 아이들 훈육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 90%가량을 쏟아부으며 가정에서 거의 3일에 한 번꼴로 매를 들어 자녀를 훈육한다. 그는 책에서 “아이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가 없으며 내가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말했다. 심지어 샤오바이유는 아이들이 소다수를 먹고 싶을 때조차 회사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받은 후 마시도록 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인류 지성사의 오래된 논쟁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인간의 지적 능력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인지 아니면 후천적인 학습과 환경의 영향에 의해 결정되는지에 대한 논쟁이다.
한마디로 ‘본성이냐 양육이냐’로 정의할 수 있는 이 논쟁은 단지 학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교육·정치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첨예한 논쟁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양측의 주장이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공산주의와 나치즘이다.
공산주의의 사회 개조론은 ‘양육’을, 나치즘의 생물학적 결정론은 ‘본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유전과학의 성과는 잠시 소강 상태에 머물던 본성과 양육 논쟁에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2001년 2월 인간 게놈 유전자가 당초 예상했던 10만개가 아니라 3만개라는 사실이 발표되자 몇몇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 수가 인간의 다양한 행동 양식을 모두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본성 대 양육 논쟁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기사에 소개된 ‘늑대 아빠’와 ‘보모 아빠’는 모두 자녀를 성공적으로 교육시킨 사람들이다. 자녀의 자율적 의사를 중시한 보모 아빠 라오하오옌씨는 자녀의 본성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는 방향으로 자녀 교육의 초점을 맞춰 성공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혹독한 훈육방식으로 ‘늑대아빠’로 불리는 중국의 사업가 샤오바이유의 가족 사진. |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늑대 아빠나 보모 아빠의 교육방식을 따라한다고 해서 자녀의 천재성을 키워낼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아빠가 서로 정반대의 방식을 택했다고 해도 결과는 확신할 수 없다. 늑대 아빠가 보모 아빠의 방식으로, 보모 아빠가 늑대 아빠의 방식으로 자녀를 교육했다면 지금과 같은 좋은 결과에 이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두 아빠의 사례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 사회에도 머리 좋은 자녀를 낳는 방법, 영재 교육을 위한 방법론,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녀 교육서가 범람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방법도 확실한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성공 사례를 무작정 따라하다가 오히려 자녀의 장래를 망치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라면 같은 설계도와 공정에 따르면 같은 제품의 생산이 가능하겠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메트 리들리가 ‘본성과 양육’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행동은 본성과 양육 모두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자칫 양비론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의 행동과 지적 능력을 본성과 양육 어느 한 가지로만 규정하는 것은 더욱 위험한 사고다. 자칫 공산주의의 사회개조론이나 나치즘의 생물학적 결정론과 같은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늑대 아빠와 보모 아빠 중 누가 옳은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누구도 확실한 해답을 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성과 양육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 논쟁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만큼 영원한 질문이면서 앞으로 끊임없이 탐구해야 할 인류의 과제이기도 하다.
비상에듀 논술강사 안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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