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폐허 딛고 선진국 도약 고마워"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다. 두 나라 국민에게 익숙한 표현이다. ‘우리는 형제’라는 표현은 실은 무슬림들끼리는 자주 사용한다. ‘기독교 형제’나 ‘불교 형제’라는 표현은 없지만, ‘무슬림 형제’라는 말은 흔하다. 이슬람권인 터키 입장에서 형제의 나라로 생각하는 대상은 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이 한국이라면 의미가 달라진다. 한국은 무슬림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터키는 60년 넘게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6·25 참전에서 시작된 우정은 스포츠를 거쳐 한국어와 K-팝을 통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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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의 한국공원에서 휘날리고 있는 태극기와 터키 국기(오른쪽). |
‘우리는 형제국’이라는 말에는 수식어를 추가하면 의미가 배가된다. ‘코레 튀르키예 칸카르테쉬디르’. “한국과 터키는 피를 나눈 형제”라는 의미다. 참전은 터키로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영광을 뒤로하고 공화국 성립 이후 처음으로 참가한 전쟁이 6·25전쟁이었다. 참전에 터키가 오히려 자부심과 고마운 감정을 담는 이유다. 터키의 참전 경험과 기억은 베트남전에 발을 담갔던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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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참전협회 회원들이 6·25전쟁 관련 지도를 보며, 한국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젊은 영혼과 육신’을 내던진 참전 군인들에게 예의를 표하기 위해 터키참전협회를 찾았다. 참전협회에는 예상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에 거주하는 친척이 시골 집성촌을 방문할 때처럼 많은 노병(老兵)이 기자를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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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에 있는 한국공원 내부의 위령탑. |
전쟁 당시 터키군 1여단 소속 소대장으로 참여했던 알리 젱기스 튀르크오울루씨는 “치열한 전투로 꼽혔던 군우리(평북 박천군)에서 터키군이 승리를 거둬, 유엔군의 철수로가 마련됐다고 워커 사령관이 고마워한 게 생각난다”며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한국이 전쟁의 아픔을 딛고, 경제·문화 선진국으로 우뚝 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에 자리를 함께한 10여명의 참전협회 회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밀감과 자부심이 혼합된 감정이 느껴졌다.
참전협회의 환대를 받자 고마움이 밀려왔다. 위령탑이 있는 ‘한국공원’과 케말 파샤 초대 대통령 기념관을 잇달아 찾았다. 한국공원이 들어선 곳은 조성 당시에는 도심이었지만, 지금은 구도심으로 인식되는 곳이다. 국부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기념관에는 어수선한 땅에서 민주공화국을 일군 케말 파샤와 그를 추앙하는 터키인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태권도…중년들이 기억하는 강한 코레
참전이 터키 원로들에게 한국 추억을 되살려내는 길이라면, 태권도는 청년들과 중년들이 한국을 배우는 방식이다. 태권도는 터키에서 축구 다음으로 인기 있는 스포츠 종목이다. 그나마 태권도와 인기 순위 2위를 놓고 경쟁하는 종목은 농구다. 이곳의 태권도 위상은 종주국 한국도 부러워할 정도다. 터키 태권도협회에 등록된 산하 협회는 1000곳이 넘는다. 언론이 주목하는 공식대회만 1년에 15개에 이른다. 등록 선수만 25만명이고,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선수는 10만명이 넘는다. 그만큼 선수층이 두텁다. 그 가족과 친척, 관계자들까지 하면 족히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태권도와 인연을 맺고 있다는 게 알리 샤힌 태권도 국가대표 감독의 설명이다. 중동과 동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이란이 태권도에 강하지만, 터키도 올림픽에서 여러 번 메달을 딸 정도로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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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제2의 스포츠인 태권도의 인기는 높다. 태권도 관련 내용을 다룬 잡지의 기사. |
“자주 있는 일이지만, 선수들을 데리고 호텔에 투숙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호텔 관계자 등이 묻습니다. ‘어린 선수들이 절도가 있고, 호텔 내의 다른 손님을 잘 배려하는데 특별한 까닭이 있느냐’고요. 그럴 때 자긍심을 갖게 됩니다. 태권도는 몸속의 안 좋은 에너지를 정화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운동이지요.”
그런 알리 감독에게도 아쉬움은 있다. “한류 문화는 태권도이고, 한류의 원조는 태권도인데, 종주국에서 인기가 시들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는 게 그의 솔직한 속내다. 도장이 지하로 밀려나거나, 사범들의 인기가 줄어들 정도로 방치되지 않도록 한국과 세계 모든 태권도인들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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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명으로 파악되는 터키의 한류팬들을 이끌고 있는 팬클럽 회장단. 이들은 평상시에도 한국 관련 소지품을 갖고 다닌다. |
참전과 태권도가 과거에서 인연의 끈을 찾는다면, 한국어와 K-팝은 현재와 미래에 인연을 만드는 통로다. 한글 강좌와 한국어가 사용되는 현장을 찾고, K-팝에 취한 젊은이들을 만나려면 터키에서 꽤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터키에서 이런 문화 현장은 여러 곳이고, 그런 현장에 모이는 젊은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한글 사랑의 현장은 앙카라대학 한국어과와 세종학당, 터키 국립도서관 한국자료실, 개원 준비에 바빴던 터키 한국문화원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에르탄 괴크멘 앙카라대 한국어과 교수는 “한국어 배우기는 세계적인 흐름이 됐다”고 분석했다. 에르탄 교수는 “예전 신입생들은 우연히 한국어과에 들어왔지만, 지금은 이미 훈민정음의 한글 자모를 알고 들어오는 경우가 태반”이라며 “한글이나 K-팝의 인기도 대단하지만,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고, 시작했으면 잘하는 한국 문화’의 힘을 배울 수 있는 게 우리 과의 더 큰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만이 아니다. 터키 국립도서관은 도서관 역사상 처음으로 2011년 1월 중앙 통로에 ‘한국 자료실’을 개원했다. 국립도서관과 한국대사관의 협조로 개원한 자료실에는 신간 등 수천 권의 한국 도서와 음반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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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국립도서관 중앙 통로에 외국 자료실로는 처음으로 한국자료실이 들어서 있다. |
시내 터키어 학원에는 자신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알아달라”며 늦은 오후에 10여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모였다. 터키의 한류 팬클럽 회장단이었다. 이들은 “한국어는 우리에게 공용어나 마찬가지”라며 “한국 연예기획사나 가수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K-팝을 사랑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될 수 있으면 한국 신문에서 우리의 뜨거운 느낌을 많이 담아달라”고 했다.
그들에게 ‘한국’을 생각하며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태극기가 그려진 가방을 내놓은 고등학생부터 한국산 필기도구와 휴대전화 등을 꺼내는 40대 남성에 이르기까지, 이들에게 한국은 애정의 대상국이었다. 할아버지 세대에서 시작해 아버지 세대를 거쳐 자신들의 세대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통로는 바뀌었지만, 사랑의 대상이 한국이라는 것은 여전했다. 피를 나눈 형제국 터키는 2011년 10월 문화적 감수성을 공유하며 한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앙카라=글·사진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세계일보·한국방문의해위원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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