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공산당이 개혁 개방 노선을 채택한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1978년12월18∼22일) 30주년을 맞아 온 중국이 떠들썩하다.
개혁 개방의 정신은 덩샤오핑(鄧小平)의 ‘흑묘백묘’(黑猫白猫)론에 응축돼 있다. 흑묘백묘론의 출발은 산시(山西)성의 속담인 황묘흑묘(黃猫黑猫)에서 출발한다. 황묘흑묘란 누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 잘 잡는 고양이가 최고라는 뜻. 덩샤오핑은 1962년 공산주의청년단 제3기 제7차 중앙전체회의에서 “어떤 생산관계이든 중국의 생산력을 회복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다”라는 요지의 흑묘백묘론을 피력한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시장주의도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그의 실용주의 노선은 문화혁명(1966∼1976년)의 광풍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한다. 그 자신도 주자파란 공격을 받아 1966년과 1976년 두 차례 실각한다.
그러나 ‘부도옹(不倒翁)’ 덩샤오핑은 마오쩌둥(毛澤東) 사망 후 실권을 장악한 뒤 1978년 자신의 정치이념을 국정노선으로 채택한다. 개혁 개방 노선은 이후 급물살을 탄다. 1980년 최초의 경제특구인 광둥(廣東)성 선전, 주하이(珠海)특구가 지정된 데 이어 광둥성 산터우(汕頭), 푸젠(福建)성 샤먼(厦門), 하이난(海南)성에 차례로 경제특구가 설치된다. 1984년에는 상하이(上海), 광둥성 광저우(廣州) 등 14개 연해도시를 개방하면서 연해도시 중심의 발전전략을 채택한다.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는 개혁개방의 갈림길이었다. 보수파의 득세로 개혁노선은 한때 주춤했다. 덩샤오핑은 그때 다시 나섰다. 1992년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당의 개혁 개방 노선은 100년 동안 흔들림 없이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2001년 상하이 푸둥을 시찰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천지가 개벽했다”고 말했듯이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1978년 이후 지난해까지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9.8%. 2003년부터 5년간은 두 자릿수 경제성장을 했다. 1978년 3645억위안이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24조6600억위안으로 67배 증가했다. 외환보유액에서도 중국은 세계 최다보유국이다.
하지만 빛이 부신 만큼 그림자도 짙다. 베이징의 한 식당에서 일하는 류웨(劉月·31·여)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 개방으로 고향의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부모가 직장을 잃었다. 인민공사가 있었다면 나도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다.”
사회 양극화는 심해지고 있다. 지니계수는 1970년대 말 0.16에서 2007년에는 0.47로 커졌다. 도시와 농촌, 연해와 내륙, 동부와 서부의 빈부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톈안먼 사태 이후 정치·민주개혁은 중단됐다. 언론·출판·결사의 자유화 정도는 다른 나라보다 크게 떨어진다.
중국의 학자, 변호사 등 1269명은 최근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의 변경을 요구하는 ‘헌장 08’을 발표하기도 했다. 뿌리 뽑히지 않는 부정 부패와 고조되는 사회 갈등, 멜라민 사태와 같은 도덕성 타락과 물신주의, 환경오염도 개혁개방 30년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이다.
베이징=김청중 특파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