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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빛낸사람들]페르디난트 포르셰 1875∼1951·독일

입력 : 2007-11-10 15:01:00 수정 : 2007-11-10 1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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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지방에서 태어난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어려서부터 전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5세 때 보헤미아 최초로 집에 전등불을 밝힌 일화는 유명하다.
왕성한 호기심과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훗날 ‘자동차 디자인의 천재’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그지만, 정작 학창 시절에는 공업학교에서 성적이 신통치 않아 중퇴하고 대학은 스스로 필요를 느끼지 못해 진학조차 하지 않았다.
빈 공업대학 청강생으로 공부하던 어느 날 오스트리아 빈 박물관에서 지그프리트 마르쿠스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가스 자동차(1874년)를 보고 그는 자동차 설계의 꿈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 전기회사에 입사하여 첫 자동차인 ‘로나 포르셰 1호’를 완성한다.
그 후 오스트로 다임러 자동차 회사에서 소형 스포츠카 ‘샤샤’를 비롯한 성능이 우수한 자동차를 설계해 자동차 경주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면서 승승장구했지만, 중역들과의 잦은 의견충돌로 회사를 그만둔다.
독일로 건너간 그는 다임러 벤츠사에 입사해 메르세데스 벤츠 K, S, SS, SSK, SSKL 등 자동차 역사에 빛나는 명차들을 잇달아 제작하게 되는데, 그 중 벤츠 SSKL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고 성능을 자랑하기도 했다.
1930년 독자적인 설계회사를 설립한 그는 히틀러가 부탁한 국민차 폴크스바겐을 1938년에 완성했지만, 2차대전 발발로 양산되지 못하다가 전쟁이 끝난 1945년에 이르러서야 판매되기 시작한다. 2차 대전 중에는 푸조의 사장 장 피에르 푸조가 독일 비밀경찰에 의해 레지스탕스 혐의로 체포돼 총살의 위기에 몰렸을 때 구해 주었다.
하지만, 전쟁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자 푸조는 포르셰를 전쟁협력자로 고발, 투옥되기에 이르렀다.
포르셰 박사 일가 모두가 투옥되었으나 아들 페리가 먼저 출소했고, 투옥 중 포르셰 박사는 르노 4CV를 설계하여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보석으로 풀려나 오스트리아로 갔다.
유럽은 물론 미국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누린 폴크스바겐과 오늘날 스포츠카의 대명사 포르셰는 자동차 설계가 인생의 전부였던 그의 ‘천재성’이 이뤄낸 산물인 셈이다.
일각에서는 그가 국민차 개발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히틀러에게 협력한 것도 그의 정치적 성향과는 관계없이 자동차에 대한 깊은 열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료:삼성교통박물관, 포르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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