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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를빛낸사람들]루이 르노 1877∼1944 프랑스

입력 : 2007-10-20 16:06:00 수정 : 2007-10-20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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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목점을 하던 프랑스 가정의 육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난 루이는 열한 살 때 직접 전등을 만들 정도로 기계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열세 살 때 증기자동차 제작자인 레옹 세르폴레의 차를 보고 자동차에 심취했다. 20살이 되던 해에 엔진을 분해하던 그는 시속 32㎞의 2인승 루이1호차를 만들었다. 당시 벨트나 자전거 체인의 구동력을 전달해 움직이던 것과 달리 루이의 차는 프로펠러 샤프트와 디프렌셜 기어로 뒷바퀴를 구동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자동차 구동장치의 시조가 됐다. 1899년 형인 페르낭과 마르셀을 설득해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 그는 같은 해 파리산업박람회에 르노1호차를 출품해 60대의 주문을 받아냈다.
1920년대 세계적인 경제공황에 따른 경기 위축으로 소형차 수요가 많아지자 르노는 시트로앵과 함께 소형차 제작을 경쟁한다. 그러던 중 르노에서 개발한 950㏄ 소형 르노 6CV가 1927년 사하라사막 횡단에 성공하면서 르노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루이는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공장의 유지를 위해 독일군에 공급할 트럭을 생산했다. 1944년 파리가 독일 점령에서 해방되자 루이는 전범 혐의로 투옥됐고, 그해 10월 풀려났지만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 생을 마감한다.
루이의 사망 이후 1945년 프랑스 정부는 그가 적국에 협력한 것에 대한 일종의 ‘벌’로 르노를 국유화한다. 하지만 1946년 프랑스에서 전범으로 투옥돼 있던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디자인한 소형차 르노 4CV가 파리 자동차박람회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1950년대 이후 프랑스의 국민차로 자리 잡았다.
특히 포르셰가 디지인한 독일의 국민차 ‘비틀’을 닮은 르노 4CV는 1964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무려 111만대가 팔려나갔다. 르노 4CV의 후속모델로 선보인 ‘도핀’ 역시 비틀처럼 엔진이 뒤에 있는 소형차로 1968년까지 거의 200만대를 생산하면서 르노를 프랑스 제1의 자동차회사로 발돋움시켰다. 이후 르노는 1970년대 석유파동과 세계적인 불황에 커다란 적자를 입었을 뿐 아니라 일본 차의 공세가 점점 거세지는 상황에서도 꾸준히 첨단기술의 자동차를 만들어오고 있다.
〈도움말:르노삼성자동차, 삼성교통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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