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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출생신고제 부모가 은폐할 수 있어 ‘유령 아동’ 위험 [뉴스 인사이드 - '출생통보제' 도입 논란]

입력 : 2020-03-29 13:15:46 수정 : 2020-03-29 13: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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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인권 사각지대 방지 여론 비등 / 출생신고 전 학대로 사망해도 알 수 없어 / 의사도 국가에 출생 통보 의무화 목소리 / 인권위 관련법 개정 권고로 논의 본격화 / 정부 ‘권고안’ 4월 발표… 도입시기 미지수 / 의료계 “행정책임에 음지 출산 조장” 반대 / 전문가 “심평원 출생신고 통로 활용 가능”

지난해 6월, 생후 10개월인 A군은 생애 첫 여름조차 맞이하지 못한 채 짧디짧은 생을 마감했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어떠한 기록으로도 남아있지 않던 A군의 존재는 죽은 지 반년 가까이 지난 뒤에서야 우연한 기회로 드러났다.

정부는 지난해 처음으로 ‘만 3세 아동 소재·안전 전수조사’를 실시했고, A군의 형을 대상으로 부모 학대 피해 여부 등을 확인하던 중 뒤늦게 A군의 출생과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검찰 조사 결과, A군은 자신의 아버지인 황모(26)씨로부터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십초간 목이 눌려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춘천지검 원주지청은 황씨를 살인 혐의로 지난달 말 구속기소했다.

A군처럼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태어났음에도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국가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유령 아동’들의 사례가 적지 않다. 이를 막기 위해 출생신고를 부모에게만 맡기지 말고, 아이의 탄생에 관여한 의사 등도 국가에 출생 사실을 통보하도록 의무를 부여하는 ‘출생통보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현행 제도로 출생신고 누락 막기 어려워

아동보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 등 21개 시민단체는 A군 살해 사건에 대해 “부모의 고의로 얼마든지 아동의 존재가 은폐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출생 미신고 사례”라며 “대한민국의 ‘출생통보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진전이 없는 사이 우리는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는 아이들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동의 인권 사각지대 방치를 막기 위한 출생통보제 도입 논의는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법무부와 대법원에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을 권고하면서 본격화됐다. 인권위는 아동 인권보호를 위해 의사·조산사 등이 출생 사실을 국가에 통보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아동의 경우 출생신고가 이뤄져야만 국가로부터 교육과 의료혜택 등의 복지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만, 현행 출생신고제도는 부모에게만 1차적으로 출생신고 의무를 부여해 부모가 고의 또는 실수로 신고를 하지 않거나, 허위 신고를 할 경우 이를 바로잡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현행법상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자녀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경우, 동거하는 친족이나 분만에 관여한 의사 및 조산사, 검사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이 출생신고를 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부모가 출산 사실이나 출생신고 여부를 외부로 알리지 않는 이상 제삼자가 상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A군의 사례처럼 문제가 발생하고 난 뒤에서야 수사 등의 과정에서 출생신고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아동보호단체는 의료기관 등이 아동의 출생기록을 국가기관에 바로 전달하면, 부모의 신고 누락으로 발생하는 ‘유령 아동’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 논의 중이지만… 도입 시점은 불투명

정부는 지난해 5월 모든 아동이 공적으로 등록돼 보호받을 수 있도록 출생통보제를 도입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의료기관이 출생하는 모든 아동을 국가기관 등에 통보하도록 가족관계등록법을 개정, 현행 출생신고 시스템의 ‘사각지대’를 최소화하겠다는 복안이다. 현재 법무부는 ‘포용적 가족문화를 위한 법제개선위원회’를 통해 출생통보제와 관련한 정책 권고안을 마련 중이다.

법무부 측의 설명을 종합하면 권고안에는 부모의 자녀 출생신고 의무를 그대로 유지하되, 의료기관도 아이의 출생 관련 정보를 정부 측으로 전달하도록 해 정부가 출생 미신고 아동의 존재 여부를 ‘교차검증(크로스체크)’하는 방안이 포함될 예정이다. 교차확인 과정에서 출생 미신고 사례가 발견되면 우선 해당 부모에게 출생신고를 하도록 하고, 이후에도 신고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가가 출생 사실을 직권등록하는 방안도 담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권고안은 이르면 다음 달쯤 발표될 계획이지만, 실제 출생통보제 도입은 언제 이뤄질지 불투명하다.

법무부 관계자는 “출생통보제 도입은 의료기관과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법원행정처 등과 협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큰 골자는 권고 형태에서 정리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부처 간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의료계는 출생통보제 도입에 반발하는 분위기다. 의료계는 이 제도로 인해 병원이 행정책임을 떠안게 되는 동시에 ‘음지 출산’ 증가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김동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직선제) 회장은 “전반적으로 산부인과의 운영 상태도 좋지 않고, 행정업무를 전담할 인력도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의사단체와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심평원 시스템으로 의료기관 부담 줄여야”

 

전문가들은 의료기관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한 방안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을 출생신고 통로로 활용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병원은 이미 출산이나 각종 수술의 보험 처리 등을 위해 환자의 정보를 심평원에 통보하고 있기 때문에, 미리 구축된 이 프로그램을 출생신고 수단으로 활용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최성경 단국대 교수(법학)는 “기존의 건강보험 청구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그나마 의료계의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식”이라며 “영세한 병·의원의 경우에는 좀 더 비용 보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정부는 출생통보제 도입 시 일부 임신 여성이 의료기관에서의 출산을 회피하는 문제 등을 막기 위해, 산모가 일정한 상담을 전제로 자신의 신원을 감춘 채 출산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도 검토하고 있다.

최 교수는 개인정보 노출을 꺼리는 산모의 의료기관 기피현상과 두려움을 줄이고, 아동이 자신의 부모에게 양육될 수 있는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 교부 등 제한 신청제도’를 출생통보제와 함께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최 교수는 “이 제도가 도입되면 아동의 출생신고는 이뤄지되, 산모가 출산했다는 사실은 일정 기간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산모는 심적 안정을 누릴 수 있고, 출생아는 국가에 인지돼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는 “(부모의 신원을 숨기는) ‘익명출산제’ 도입 시, 아이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 부모와 아이가 모두 동의한 상태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을 기회를 제공하는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영구적인) 익명출산제를 도입하는 것은 부모의 권리만 생각한 것이지, 아동의 권리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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