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APEC서 北·美 만남 추진
北 ‘적대적 두 국가론’ 강력 고수 감안
李대통령, 한국 역할 제한적 인식 반영
김정은, 만남 응해도 경주까지 안 올 듯
2019년처럼 ‘판문점 회담’ 전망도 나와
北 ‘핵보유국 지위 인정’ 지속 요구 상황
美 ‘北 비핵화 고수’ 대화 재개 쉽지않아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5일(현지시간) 정상회담에서 북·미 대화 추진에 뜻을 모으면서, 2019년 6월 판문점 남·북·미 정상 회동 이후 멈춰선 북핵 협상이 다시 열릴지 주목된다. 구체적으로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를 계기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나는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다만 북한이 증강된 핵 무력과 러시아와의 밀착 관계를 바탕으로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요구하는 상황이라 대화 재개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이날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개최된 첫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메이커’로 치켜세우며 김 위원장을 만나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통령 자신은 북·미 대화를 지원하는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하면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의 만남은 좋은 일이라면서 올해 안에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화답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페이스메이커에는 북·미, 남북 대화 재개에 한국 정부가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이라는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어떤 제안이 나오든 한국과 마주 앉을 일 없다”(김여정 부부장 지난달 28일 담화)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북·미 대화 성사를 위한 여건 조성에 노력하며 그 성과를 기반으로 남북 관계의 돌파구를 모색하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페이스메이커 표현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 간 세 차례의 정상회담이 이뤄진 2018∼2019년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내세운 ‘한반도 운전자론’과 유사하면서도, 미국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는 평가가 나온다. 자신을 피스메이커로 칭하며 국제 문제 해결을 통한 성과 쌓기를 중시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네이밍’이라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보인다.

올해 중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만날 수 있는 자리로는 10월31일부터 경주에서 열리는 에이펙 정상회의가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에이펙 참석 의사를 밝혔고, 이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방한 시 김 위원장과 만나는 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참석을 전제로 김 위원장에게 에이펙 초청 의사를 전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분위기다.
다만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에 응하더라도 한반도 남부의 경주까지 내려올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많다. ‘수령체제’인 북한 특성상 최고지도자가 다자외교 무대에 참석한 전례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적대적 두 국가론을 헌법화하겠다는 상황에서 김 위원장 방한은 기대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김 부부장은 지난달 대남 담화에서 정치권 일각의 김 위원장 에이펙 초청 검토에 “헛된 망상”이라고 비난한 바 있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이날 출근길에 취재진과 만나 “(김 위원장의 에이펙) 자체 참석은 비현실적”이라며 “(현재로선)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에 또 방한할 건 아니니까 에이펙 참석차 방한하는 계기를 (북·미 정상회담 성사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정 장관은 이어 “현재로선 (북한과) 접점이 없다”면서 북·미 대화 여건 조성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2019년 6월처럼 남·북·미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판문점 번개팅’으로도 불리는 이 회동은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 오사카에 방문했다가 개인 트위터에 김 위원장과 비무장지대(DMZ)에서 만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며 극적으로 성사됐다. 당시 남·북·미 정상은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잠시 만났고,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배석자 없이 단독 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이 역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서 남한을 배제하려는 현 상황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시나리오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응할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비핵화’ 원칙을 견지하고 있는데, 북한은 고도화한 핵 무력을 손에 쥐고 핵보유국 지위 인정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비핵화 요구에 대해 “대방(상대)에 대한 우롱”(김 부부장 지난달 담화)일뿐더러 “실천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불가능”(김 부부장 지난 4월 담화)하다고 거듭 밝혀 왔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핵화 목표를 포기하고 핵 군축 협상과 같은 전격적인 조건을 내걸지 않는 이상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에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더욱이 북한은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혈맹’을 맺은 러시아를 뒷배로 삼고 있다. 러시아와 큰 틀의 대외 전략에 보조를 맞추며 당장의 군사·경제적 필요를 해결하고 있다. 미·러 간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이 진전돼야 북·미 대화의 여지가 생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2019년 ‘하노이 노딜’의 충격은 북·미 양측에 협상에 신중을 기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문제에 대한 양국 공조를 확인한 만큼 ‘한국 패싱’ 우려는 덜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앞으로도 긴장을 늦추지 말고 미국과의 조율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의 회담장에서 한국의 사정을 고려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에마 챈렛 에이버리 아시아소사이어티 정치·안보담당 국장은 “이재명정부는 한국이 소외되거나 (미국 정부와) 김 위원장의 별도 협상이 한국을 배제한 채 이루어질 가능성을 우려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향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한국의 국익에 반해 북핵 문제가 합의되지 않도록 미국과 사전 협의를 잘하는 게 중요한 외교적 과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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