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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면한 ‘일본식 사찰’… 평등·포용 불교의 가르침 담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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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13 06:00:00 수정 : 2025-08-12 20: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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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군산 동국사

일제강점기 군산 日사찰 8개 지어져
1970년 금강사→동국사로 개명 마쳐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로 철거 위기
주지스님 ‘아픈 역사 증언 가치’ 생존

석주에 日 연호·시주자 이름 깎여 있어
일제 흔적 지우고 새 의미 더하기도

1899년 5월, 한반도에서 일곱 번째로 개항한 군산은 이후 호남 지역 최대의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군산이 개항된 표면적인 이유는 대한제국의 경제 발전을 위한 자구적 노력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들이 비옥한 호남평야에서 생산한 쌀을 효율적으로 수탈해 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다른 개항 도시인 인천과 달리 군산에 사는 외국인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구체적으로 1925년 군산 인구의 33%에 달하는 7198명이 일본인이었다.(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

군산은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도시였다. 개항 후 도시 곳곳에는 자신들의 사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금융기관(조선은행 군산지점,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과 미곡취인소, 생활편의시설(군산의료원, 군산도서관 등)이 들어섰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믿었던 불교의 사찰도 그중 하나였다.

한일 병합이 일어나기 1년 전 일본의 노승 우치다 붓칸이 설립한 ‘금강선사’에서 시작된 동국사는 일본인들의 무운과 번영을 기리는 사찰이었다. 해방 후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 위기까지 몰렸던 동국사가 이제는 ‘평등과 포용’의 가치를 말하는 대한민국의 절이다.

군산에는 총 8개의 일본 사찰이 있었다. 서울에 13개 정도가 있었다고 하니 적지 않은 숫자다. 군산에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찰은 동국사(옛 금강사)가 유일하다. 전국으로 범위를 넓혀보면 한때 500곳이 넘었던 일본 사찰 중 건물이 남아있는 곳은 총 4곳뿐이고 이 중 동국사와 대구 삼덕동에 있는 관음사만 지금도 사찰로 쓰이고 있다. 그외 경주시의 옛 서경사는 경주 무형문화재전수교육관으로, 목포의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오거리문화센터로 바뀌었다. 흥미로운 점은 네 건물 모두 도심이나 기차역 또는 시장과 가까운 번화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찰 하면 떠올리는 산속 깊은 입지와는 확실히 다르다.

일본 사찰이 번화가나 그 인근에 자리 잡은 이유는 사찰이나 신사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발달하는 ‘사전촌락(寺前村落)’이라는 독특한 개념 때문이다. 실제 일본에서는 대규모 사찰을 찾는 참배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숙박 및 판매시설 등이 입구 주변에 들어서면서 마을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유곽이 들어서기도 했는데, 군산 동국사도 동쪽에 있는 명산시장 일대가 일제강점기 군산 최대의 공창(公娼) 지역이었다.

동국사가 마을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본당인 대웅전으로 접근하는 과정도 우리네 산사와는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본존을 모시는 본당은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참배객들은 본당까지 가는 동안 일주문-천왕문-불이문을 순서대로 지나는데, 그 과정에서 속(俗)의 세계와 멀어지고 성(聖)의 세계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동국사에는 이런 과정이 없다. 경내로 이어지는 경사로 초입의 도로 옆에 있는 석주와 입구에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지주(支柱)가 문의 역할을 할 뿐이다.

많은 사람이 경사로를 올라 바로 보이는 대웅전으로 향하느라 세 석주를 그냥 지나친다. 하지만 이 석주들에는 그간 우리가 동국사를 어떤 시선으로 대해왔는지를 드러내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연호인 ‘昭和(쇼와)’와 시주자들의 이름이 깎여 있고 동국사가 소속돼 있었던 ‘조동종(曹洞宗)’이라는 글자는 석조명패에서 파내져 있다. 이는 동국사에서 일제의 흔적을 지우려는 수고다.

반면, 입구 양쪽 기둥에 한글과 한자로 각각 새겨진 ‘노희윤(盧熙潤)’이라는 이름도 볼 수 있다. 찾아보니 노희윤은 시주자가 아니라 병을 앓던 아이의 이름이라고 한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동국사를 관리할 때 자식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노희윤의 아버지가 석주에 이름을 새겼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무운과 번영을 빌던 동국사가 여전히 영검한 곳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대웅전은 전형적인 에도시대 건축 양식으로 1932년에 다시 지어졌다. 외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건물 벽체와 비슷한 높이의 지붕이다. 75도의 급경사를 이루는 지붕 물매와 일직선의 용마루는 건물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을 형성한다. 그래서 혹자는 대웅전의 지붕을 보며 사무라이의 투구를 닮았다고 얘기한다.

대웅전의 지붕은 건물의 좌향과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대웅전과 같은 본당은 일반적으로 남쪽을 향해 있다. 채광이나 통풍 같은 실용적인 이유도 있지만 이보다 불교에서 남쪽을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이 널리 비치는 방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웅전은 월명산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유를 짐작해 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일본에서 사찰이 동네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 일대 어디에서나 동국사가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웅전의 배경이 되는 월명산에 자신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대나무를 일본에서 가져와 심고 건물의 크기에 비해 과한 지붕을 올려 시선을 이끌었다.

대웅전 내부로 들어서면 현관-외진(外陣)-내진(內陣)으로 구성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현관은 예불을 드리기 위해 신자들이 신발을 벗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외진은 신자들이 예불을 드리는 곳이고 내진은 김제시 금산사에서 가져온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각 공간은 미닫이문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문틀과 천장에 환기창(란마;らんま)만 남아있다. 이외에도 결혼한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와 대웅전이 회랑으로 연결된 구조도 동국사가 일본 사찰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동국사는 ‘발해 동쪽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의미로 1970년 남곡 스님이 개명했다. 이후 동국사는 일본인이 만들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사찰이 됐다. 그러다 1996년에 돌연 철거 위기를 맞게 되는데, 광복 50주년에 맞춰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으로 일제 당시 지은 건물을 철거하는 유행이 번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국사가 소속돼 있는 조계종과 당시 주지 스님이 아픈 역사를 증언하는 가치를 강조하고 말사(末寺)라는 법적 지위를 주장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산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건축물들은 동국사와 유사한 과거를 거쳐왔다. 그 과정에서 몇몇은 사라졌고 남은 건축물은 지금의 필요에 맞춰 미술관이나 박물관으로 바뀌거나 비어 있다. 그중 동국사는 유일하게 과거의 용도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며, 일제의 잔재를 지우려고 했던 흔적과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새기려는 노력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2005년 주지로 부임한 종걸 스님은 이러한 동국사의 변화를 상징하듯 ‘금강사’라고 적힌 석조명패 위에 ‘이 문은 문이 아니다’라는 뜻의 ‘此門不門(차문불문)’이라는 글씨를 내걸었다. 이 문구는 동국사가 이제 ‘평등과 포용’이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공공공간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대변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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