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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낭만에 대한 희망… 불꽃처럼, 눈부시게 피워내다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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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8-05 06:00:00 수정 : 2025-08-04 19: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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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크와 8월의 태양

시인이자 화가·판화가였던 블레이크
18세기 산업혁명 속 격변의 시대 살아
시·그림 결합 ‘릴리프 에칭’ 기법 개발
펜·수채 덧입히는 독창적 기법도 완성

기계식 판화의 한계 넘어 새 창작의 길
모호·강렬함 공존해 독자 상상력 자극
런던 예술계 한복판에서 독특한 비전
세상 떠난 후 낭만주의 선구자로 인정

1년 중 가장 뜨겁고 눈부신 시기. 정점에 선 태양은 곧 내려앉을 운명을 예감하듯 마지막 광휘를 내뿜고, 여름은 끝을 향해 기울기 시작한다. 영광과 쇠락이 공존하는 순간, 작열하는 8월의 태양 빛을 바라보며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를 생각한다.

◆불안한 시대의 예언자

영국 런던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 판화가였던 블레이크는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18세기 런던은 산업혁명의 검은 연기와 차가운 기계음으로 가득했고, 제국주의와 식민의 그늘 아래 인간의 존엄은 침식당했다. 프랑스혁명의 열병이 유럽을 휩쓸며 신과 인간, 자연과 사회의 관계가 근본부터 흔들렸다. 블레이크가 바라본 도시는 화려한 발전 속에 갇혀 질식하는 영혼들의 공간이었다.

이성과 합리주의가 초래한 비명 속에서, 그는 홀로 상상과 낭만을 펼쳐내고 있었다. 8세 때부터 나무 위 천사를 보고 미래를 예언하는 등 환시를 보았던 그에게서 부모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발견했고, 결국 드로잉 아카데미를 거쳐 판화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판화가로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렸지만, 그는 점차 상업 출판을 벗어나 예술적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1787년경 ‘릴리프 에칭’ 기법을 개발했다. 이전에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각기 다른 판에 새겨 따로 인쇄해야 했지만, 그는 한 판에 함께 새길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 시와 그림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예술 양식을 구축했다. 여기에 펜과 수채를 덧입히는 ‘일루미네이티드 프린팅’이라는 독창적 기법을 완성했다. 중세 채색 필사본에서 영감을 받은 이 방식은 기계식 판화 제작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창작의 길이 되었다.

◆어린양과 호랑이가 함께하는 곳

1789년 발표된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는 새로운 인쇄 기법을 완벽히 구현한 첫 작품집이다. 블레이크는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킬 근원으로 어린아이의 순수를 상상하였고, 19점의 시와 그림에 유년기에 깃든 신성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양들이 풀을 뜯던 그곳에서 빛나는 천사들의 발이 고요히 움직입니다. 보이지 않는 그들이 축복과 기쁨을 끊임없이 쏟아붓습니다. 낱낱의 싹과 꽃에, 그리고 낱낱이 잠든 가슴에.” 그의 시구에는 형상 너머의 진리를 발견하려는 열망, 참새와 들풀, 시냇물 소리에서 신비와 환희를 느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스며 있다.

‘순수의 노래’ 중 ‘아기의 기쁨’, 1789(1825년경 인쇄),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Open Access

5년 뒤에는 ‘경험의 노래(Songs of Experience)’를 더해 두 작품을 합본으로 출간했다. 후자는 프랑스혁명 이후의 격동 속에서 타락한 물질세계와 인간 영혼의 상실을 은유하며 전작과 변증법적 대조를 이룬다. 두 작품 속 유사한 제목의 시들은 순수의 세계와 변질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춘다. 블레이크에게 선과 악, 순수와 경험과 같은 대립은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 힘이었다. 어린양과 호랑이라는 상징을 통해, 그는 음과 양이 공존하는 합일된 세상을 꿈꿨다.

‘경험의 노래’ 중 ‘아기의 슬픔’, 1794(1825년경 인쇄),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Open Access

그의 작품에는 몽상과 환시라는 몽환적 영역과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함께 깃들어있다. 텍스트를 둘러싼 조형적 요소와 화면을 가득 채운 구도는 중세 필사본을 떠올리지만, 강렬한 선과 극적인 감정 표현은 낭만주의적 특성을 드러낸다. 모호함과 강렬함의 공존은 공포와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장을 펼쳐내며, 독자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한다.

◆두 얼굴의 태양

블레이크는 성경부터 셰익스피어, 단테에 이르기까지, 서구 사유의 근간인 고전을 재해석하여 자신의 비평적 통찰을 이미지에 담았다. 또, 인류 정신사의 고통과 구원을 종말론적 비전으로 풀어낸 방대한 서사시, 예언시를 남겼다. 1794년 제작된 작품집 ‘유럽, 하나의 예언(Europe a Prophecy)’의 표제지 ‘옛적부터 계신 이(The Ancient of Days)’는 두 영역이 융합된 그의 신화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백발의 노인이 붉게 빛나는 구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한 손에는 컴퍼스를 쥐고, 정밀하게 각도를 재며 빛을 펼쳐낸다. 조물주를 연상시키는 이 인물은 블레이크가 창조한 가상의 신 우리즌(Urizen)으로,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하는 이성을 표상하는 동시에 우주의 힘에 닿아 있는 숭고한 신의 모습을 지닌다.

‘유럽, 하나의 예언’의 표제지 ‘옛적부터 계신 이’(플레이트 1), 1794, 37.5×26.7cm. © Yale Center for British Art, Paul Mellon Collection

작품의 제목은 구약 다니엘서 7장 9절 “내가 바라보니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계신 이가 그 위에 앉으셨는데,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양털같이 윤이 났다. 옥좌에서는 불꽃이 일었고 그 바퀴에서는 불길이 치솟았으며, 그 앞으로는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나왔다.”에서 비롯되었다. 성서에서 ‘옛적부터 계신 이’는 불처럼 강력한 절대자이나, 블레이크는 이 이미지를 확장해 합리와 질서를 다스리면서도 창조의 불을 지닌 신으로 변주시켰다.

태양이 생명을 키우면서도 말라죽게 할 수 있듯, 우리즌은 창조와 제한, 빛과 억압이라는 양가적 힘을 지닌다. 컴퍼스로 빛을 그리는 행위는 질서를 부여하면서도 자유를 속박하는 그림자를 드리운다. 블레이크는 이 긴장 속에서 인간 정신의 진보와 퇴행, 해방과 속박이라는 양면성을 읽어냈다. 이 작품은 블레이크가 가장 사랑한 이미지 중 하나로, 죽기 직전 병상에서도 복제본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끝나지 않는 계시

블레이크는 런던 예술계 한복판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독특한 비전과 고집으로 점차 주류 사회에서 고립되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순수와 낭만에 대한 희망을 불꽃처럼 피워낸 그는 1827년 8월 12일, 태양이 황혼으로 기울던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블레이크는 19세기 라파엘전파 예술가들에 의해 재평가되며 낭만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상상력을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 말한 그의 시공을 뛰어넘는 성찰은 20세기 밥 딜런, 앨런 긴즈버그와 패티 스미스를 거쳐 지금까지도 수많은 예술가의 영감이 되고 있다.

블레이크에게 언어와 이미지는 단순한 조형적 매체가 아닌 신성한 계시의 통로였다. 한여름 태양의 현기증과 황홀이 그만큼 깊고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듯, 그의 예술은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영적 세계의 문을 두드린다. 누군가는 그를 광인이라 불렀지만, 그는 예술가이자 인간으로서 소명을 지니고 세상을 깊이 사랑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노래했다.

“나의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말했다. ‘기쁨과 환희로 만들어진 작은 생명아, 가서 사랑해라, 세상에 도와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 ㅡ 블레이크의 노트에 적힌 시.


신리사 미술사·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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