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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유적’ 도심 소각장… 현재의 아카이브가 되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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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7-30 06:00:00 수정 : 2025-07-29 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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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부천아트벙커 B39

숨어서 우리 삶 지탱한 도시기반시설
본연의 기능 다한 후에 존재 어필 시작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던 소각장
축가, 휴먼 스케일 맞춰 재탄생시켜
디스토피아적 감성·노스탤지어 ‘교차’
평범한 일상 기록하는 ‘고현학’ 사료로

가끔 시장이나 마트 진열대를 가득 채운 상품들을 보며, 저 많은 물건이 어디서 생산되어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그 과정을 떠올려 본다. 반대 상황은 아침 출근길, 밤새 쌓여 있던 쓰레기들이 말끔히 치워진 길거리를 볼 때다. 잠시 방을 비운 동안 조용히 들어와 어질러진 방을 치우는 엄마의 손길처럼, 수북이 쌓인 쓰레기는 밤사이 우리 눈앞에서 어딘가로 조용히 사라진다. 생각해 보면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설과 사람이 제 역할을 해낼 때 도시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숨어서 우리의 삶을 묵묵히 지탱해 주었던 시설들이 최근 우리 눈앞에 하나씩 나타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상하수도처리장, 지하 배수로, 방공호, 유류저장고 등과 같은, 법적으로 도시기반시설들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시작하는 때는 본연의 기능이 끝난 후다. 부천시의 ‘삼정동 소각장’도 2018년에 ‘부천아트벙커 B39’라는 이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된 뒤에야, 1995년부터 15년간 부천시에서 배출되는 하루 200t의 쓰레기를 처리해 왔다는 역할을 알게 됐다.

쓰레기를 소각하기 전 임시로 모아두었던 저장소(벙커)에서 이용자들은 아파트 13층 높이의 육중한 콘크리트 벽을 마주한다. 자신보다 훨씬 큰 벽 앞에서 이용자들은 과거 쓰레기 소각장이었을 때는 상상할 수 없었던 압도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건물의 새로운 이름이 ‘B39’가 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과거 쓰레기 저장조로 쓰였던 ‘벙커’다. 쓰레기를 소각하기에 앞서 임시로 모아 두었던 이곳은 냄새를 비롯해 침출수, 유독가스 등이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두터운 콘크리트 벽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모습이 벙커(Bunker)를 연상시켜 ‘B’를 썼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기능인 복합문화시설이 ‘한계가 없는(‘B’oundless)’ 장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고 있다.

‘39’는 건물 인근을 지나는 국도의 번호이기도 하고 벙커의 높이이기도 하다. 벙커가 창작 전시나 공연 및 촬영 장소로 쓰이기는 하지만 실제 이 공간의 매력은 아파트 13층 높이의 육중한 콘크리트를 마주하는 경험 그 자체에 있다. 거대한 존재나 가늠할 수 없는 공간 앞에 서면, 인간은 압도감과 경외감을 느낀다. 리모델링 설계를 맡은 건축가 김광수(studio_K_works의 대표)가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들었다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가 의인화된 느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벙커 천장에서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초월적인 절대자의 존재를 떠오르게 한다.

‘삼정동 소각장’이었을 당시 수거차는 건물 서쪽으로 난 길을 통해 반입실(현재 멀티미디어홀)로 진입해 저장조(벙커)에 쓰레기 더미를 쏟아냈다. 저장조에 일정량의 쓰레기가 모이면 소각로(에어갤러리)에서 태웠다. 마지막으로 타고 남은 재는 재벙커에 모았다가 크레인으로 퍼서 매립장(재벙커&크레인 조종실)으로 내보냈다. 건축가는 쓰레기가 처리되는 공정에 맞춰 B39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새로운 동선을 계획했다. 단, 쓰레기 소각 공정은 기계로 통제되는 규모이기 때문에, 새로운 동선을 계획할 때는 이용자들이 공간을 적절히 체험할 수 있도록 휴먼 스케일(Human scale)에 맞췄다. 그리고 몇 가지 장치를 더했다.

주민들이 걸어서 B39로 접근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축물의 동쪽 입면.

첫 번째 장치는 수거차가 건물로 진입하는 동선과 분리된 이용자 진입 동선이다. 수거차는 시설 남쪽에 있는 사거리에서 진입했었다. 하지만 B39의 이용자는 시설 동쪽을 지나는 석천로에서 진입하는 게 짧고 훨씬 편하다. 설계자는 석천로를 따라 조성돼 있던 완충녹지를 열린 광장으로 바꾸고 그 배경이 되는 관리동 동쪽에 기둥을 줄지어 배치한 새로운 입면을 만들었다. 그는 지붕이 덮인 공간이 이용자들의 진입 동선이 되기를 바랐다. 현재 진입광장은 예산 부족으로 실현되지 않았고 석천로와 연결되는 보행로만 만들어져 있다.

두 번째 장치는 1층 로비와 카페를 가로지르는 반원형 아치 모양의 긴 천장 구조물이다. 이용자들은 천장 구조물을 따라가며, 다용도 야외 중정으로 바뀐 에어갤러리 그리고 1층 안쪽에 유인송풍실과 2층의 중앙제어실, 3층의 배기가스처리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모두 과거에 썼던 기계설비가 남아 있는 공간들인데, 그래서 새로 설치된 천장 구조물은 이용자들을 과거로 이끄는 안내자 같다.

세 번째 장치는 벙커를 가로지르는 다리(벙커브리지)다. 다리는 멀티미디어홀과 로비를 연결하는데, 이를 통해 과거 쓰레기의 소각 공정과 현재 복합문화공간의 이용자 동선이 평행을 이루며 완성된다. 이용자들은 소각 공정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란히 이동하면서 기능이 바뀐 공간들과 남겨진 설비들을 바라본다.

한때 쓰레기를 태우는 데 사용됐던 B39의 공간과 설비들은 우리에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낡은 기계들이 주는 황량한 미래의 한 장면 같은 느낌(디스토피아적 감성)이나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노스탤지어)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의 역사는 그리 머지않은 어제의 이야기다. 확실한 건 B39에서 마주하는 장면이 우리에게 무척 낯설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말없이 우리의 생활을 유지해 주었던 도시기반시설들을 굳이 볼 필요가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생경함’을 느낀다.

생경함은 우리가 다른 기능으로 소생한 옛 도시기반시설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 과거 인류의 삶과 문화를 유물과 유적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을 ‘고고학(考古學)’이라고 한다. 반면,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일상과 유행의 변화를 조사하고 기록하여 그 시대의 본질을 연구하는 학문을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면, ‘오래된 과거’를 연구하는 것이 고고학이라면, ‘가까운 과거, 즉 현재’를 탐구하는 것이 고현학이다. 현재를 정확하게 보려면 당연하고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생활자의 시선’이 아니라, 관성에서 벗어나 한 발짝 떨어져 낯설게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고고학자가 유적지에서 옛 유물을 발굴하듯 B39를 비롯해 최근까지 사용되다 폐기된 도시기반시설들은 고현학자들이 활동하는 ‘어제의 유적지’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생소한 감정 뒤에 찾아오는 숨겨진 발견의 재미를 경험한다.

특정 시대의 필요에 따라 쓰레기 소각장을 비롯한 도시기반시설들이 만들어졌듯이, 수명을 다한 시설들이 대부분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는 현상 또한 지금 시대의 필요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복합문화공간들은 단순히 잘 고쳐진, 지자체 어디에나 있는 문화시설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기능에서 현재의 용도로 어떻게 변모했으며, 그 변화 속에서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와 도시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여전히 도시 속에서 작동하는 ‘현재의 아카이브’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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