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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부조리·권력·욕망… 불편한 진실, 예리한 시선으로 응시하다 [신리사의 사랑으로 물든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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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5-05-26 20:13:04 수정 : 2025-05-26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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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리: 패티 스미스 ‘구원의 예술’

펑크록의 전설이자 전방위 예술가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와 협업 전시
시와 소리 교차 ‘끝나지 않을 대화’

체르노빌의 붉은 숲… 멸종된 생명들…
과거 기록, 현재를 향한 경고로 전환
‘창조·연대 힘으로 극복’ 큰 울림 전달

머리에 꽃을 꽂고 사랑과 평화를 노래하던 히피 운동이 1969년,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진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역사 속으로 퇴장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의 후유증과 극심한 경기 침체로 어둠이 드리운 1970년대 미국, 젊은이들은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 환멸을 거침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펑크록의 전설이자 시, 문학, 사진 등을 넘나드는 전방위 예술가, 패티 스미스의 예술도 이러한 시대의 전환점에서 시작되었다. “왜 우리는 침묵해야 하는가?” “왜 여전히 사랑을 믿어야 하는가?” -의문들은 시가 되었고, 원초적인 사운드를 만나 하나의 예술적 형식으로 승화되었다. 펑크록의 목소리는 분노였지만, 스미스에게 그것은 침묵에 맞서는 기도였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 패티 스미스 ⓒ Vanina Sorrenti and Jesse Paris Smith

지난 50년 동안 스미스는 모순과 부조리, 권력과 욕망의 폐해, 그리고 자연 파괴나 온기 없는 과학이 초래한 재앙을 예리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주저 없이 목소리를 냈다. 보호해야 할, 사랑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때때로 자신의 새끼를 지키려 울부짖는 어미 늑대처럼 굳세고 날카롭다. 글자에 불과했던 단어들은 무거운 감정으로 엮여 바위보다 단단한 힘을 지닌다.

◆만남의 예술

시와 음악이 손을 맞잡고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낸 그 순간부터, 스미스의 예술에는 늘 ‘만남’이 있었다. 영혼의 동반자였던 로버트 메이플소프와의 인연부터 남편 프레드 소닉 스미스의 옆에서 감자를 깎다 탄생한 노래 ‘피플 해브 더 파워(People Have the Power)’, 아르튀르 랭보와 윌리엄 블레이크 같은 예술가들과의 정신적 대화까지, 그의 작품에는 수많은 교류의 흔적이 배어 있다. 서울 피크닉에서 7월 20일까지 진행되는 사운드워크 컬렉티브와의 협업 전시 ‘끝나지 않을 대화’도 이러한 ‘만남’을 이어가는 자리다. 사운드워크 컬렉티브는 특정 장소나 맥락에서 비롯된 사운드를 바탕으로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개념을 탐구하는 예술 그룹이다. 축적된 역사와 문화, 환경의 기억을 소리로 채집하고 조합하면, 스미스는 시를 써 내려간다. 낭독과 현장음, 전자 음악이 결합된 실험적인 사운드에 시각적 요소를 더해 탄생한 영상 8점과 함께 드로잉, 사진, 캘리그래피 등이 이번 전시에 소개된다.

‘수도자와 예술가와 자연’,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 전경.

◆구원에 대하여

‘대화’와 ‘만남’이라는 개념은 작품의 형식으로도 이어진다. 각각 독립적인 서사를 지닌 8점의 영상 작품들은 두폭화(diptych) 형태로 전시된다. 두 점의 작품이 서로의 시작과 끝에 맞물려 순차적으로 상영되거나, 하나의 사운드를 공유하며 같은 공간에서 펼쳐지기도 한다. ‘체르노빌의 아이들’과 ‘수도자와 예술가와 자연’은 시대와 주제 면에서 느슨하게 연결된 듯 보이지만, 비극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스미스의 일관된 사유를 품고 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구역 중 하나이자, 인간의 부재 속에서 생태계의 회복이 일어난 체르노빌 ‘붉은 숲’에서 채집한 소리에서 출발한다. 방사능에 오염된 피아노 소리, 윙윙거리는 파리 소리와 새의 지저귐, 깊게 공명하는 진동음이 폐허로 남아버린 건물과 이곳에서 삶을 이어가는 생명들의 모습과 겹쳐지며 파괴 이후 남은 것들의 존재를 증명한다. 스미스는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기이하고도 경이로운 공간을 천천히 더듬는다. 관객 앞에 소환된 붉은 숲의 ‘유령’들은 인간의 폭력성이 가져올 수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떠난 자리에 새로이 피어난 것들을 현시한다. 작품이 끝을 향해 갈수록 체르노빌 어린이 합창단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무고하게 희생된 순수한 영혼들을 어루만지고 비극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생의 힘을 또렷하게 응시하게 한다.

이어서 상영되는 ‘수도자와 예술가와 자연’은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영화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차용한 작품이다. 중세 러시아의 이콘 화가 루블료프의 삶을 통해 예술가가 겪는 좌절과 소명, 희망의 서사를 담아낸다. 루블료프는 현실에서 목격한 인간의 야만성에 절망하고 붓을 내려놓지만, 아무런 지식 없이 신념과 직관으로 종을 주조하는 한 소년을 바라보며 다시 예술가의 길로 돌아선다. “그대는 종을 주조한다. 그대는 이콘화를 그린다(You cast bells, you paint icons).” 주문처럼 낮게 울리는 스미스의 목소리는 예술가의 탄생을 선언하며, 신의 침묵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창조를 이어가고 구원받을 수 있는지 예언한다.

‘산불 1946-2024’, ‘대멸종 1946-2024’, ‘끝나지 않을 대화’ 전시 전경. 피크닉 piknic 제공

◆사라진 존재들을 위한 목소리

비극과 희망, 파괴와 창조는 생태계를 다룬 작업에서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하나의 설치물처럼 구성된 ‘산불 1946-2024’와 ‘대멸종 1946-2024’는 스미스가 태어난 1946년부터 2024년까지 전 세계에서 발생한 주요 산불과 멸종된 종들의 이름을 호출하는 작은 ‘애도의 방’이다. 타오르는 불길과 박제된 생물의 확대된 얼굴이 벽면을 가득 채워, 우리가 마땅히 보호해야 했을 존재들과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생명들을 마주하게 한다. 라이트테이블 위에는 그 이름들이 촘촘히 쌓여있다. 새까맣게 타버린 존재들의 흔적이 여전히 어디선가에서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를 존재들의 영(靈)을 호명한다. 뉴스 리포터처럼 분명하고 단호한 스미스의 목소리는 공간 안에서 증폭되며 과거의 기록을 현재를 향한 경고로 전환한다.

◆평화로운 왕국을

수많은 말과 소리, 이야기로 가득한 전시실 문을 열고 나오면, 환한 햇살 아래 녹색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두 작가가 한국 비무장지대(DMZ)의 토양과 생태를 연구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보이지 않는 풍경’이다. 비무장지대는 체르노빌의 붉은 숲처럼 인간의 간섭이 멈추자 생태계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테라리움과 희귀 식물 종의 이름 등으로 이루어진 이 정원은 자연의 회복력에 대한 경의이자, 두 예술가가 치유의 가능성으로 건네는 제안이기도 하다. 고요한 자연으로 귀결되는 전시는 스미스가 50년간 예술가로서 견지해온 비판적 시선과 경고가 결국 세상의 조화와 평화를 위한 것이었음을 상기한다. 2004년 발표된 곡 ‘피서블 킹덤(Peaceable Kingdom)’의 가사처럼, 예술의 창조력과 연대의 힘으로 비극을 극복하자는 스미스의 외침은 긴 시간을 통과해 오늘도 살아 있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왜 우리는 이 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숨겨야 하나요?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살아가게 될 거예요. 언젠가는 우리가 충분히 강해져서, 다시 세워낼 수 있기를. 그 평화로운 왕국을.”


신리사·전시기획자, 학고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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