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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리본은 빛바랬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 [심층기획-세월호 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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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15 06:00:00 수정 : 2024-04-15 19: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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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치유되지 않은 상처

진도 팽목항·목포·안산 가보니

10년 전 참사, 사회서 점점 희미해져
당시 현장에서 구조 도운 지역 주민
“정말 많이 변해… 옛 모습 안 떠올라”
시민 “추모 강요 안되지만 잊어선 안돼”

단원고 ‘기억교실’ 추모 발길 이어져
유족 “참사 반복 막기 위해 기억해야”

7일 오후 출항 시간에 맞춰 여객선 한 대가 떠나자 인적이 드문 외딴 항구엔 적막감이 감돌았다. 팽목항이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전남 진도항.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던 동거차도 해역과 가장 가까운 항구다. 사고 당시 배에 탑승했던 이들의 가족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애타게 구조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304명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 희생자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방파제 한쪽 벽면에 묶어 둔 노란 리본은 이제 추모의 상징이 된 채, 외로운 항구에서 10년 전 벌어진 참사의 기억을 전하고 있었다. 리본은 ‘이젠 다 잊지 않았느냐’고 책망하는 듯이 바닷바람에 흔들리며 쉰 소리를 냈다.

 

바람이 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방파제 한쪽에 걸린 추모 벽화를 보고 있는 박귀숙(62)씨와 치매에 걸린 노모(91)가 눈에 띄었다.

추모 공간 관리 지난 7일 전남 진도 진도항(팽목항)에서 팽목마을 이장 임남곤(왼쪽)씨와 자원봉사자가 낡은 노란 리본을 정리하고 있다. 진도=최상수 기자

박씨는 참사 당시 진도의 한 중학교 교사였다. 그는 “딸이 하나 있는데 참사를 겪은 단원고 학생들과 나이가 같다”며 “당시의 기억이 아주 생생한데,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의 노모는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박씨는 “가까운 순서대로 기억을 못 하신다”며 “일제강점기는 알아도 10년 전의 참사는 모르신다”고 말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딸의 말을 듣고 있던 노모는 참사 소식을 처음 접한 것처럼 “워메 눈물이 나오려 하네. 딱한 새끼들”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1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는 잊혀 가고 있다. 누군가는 참사가 정쟁의 도구가 됐다며 귀를 막았다. 또 누군가는 아픈 기억을 들추기 두려워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이젠 4월이 와도 세월호를 떠올리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렇게 잊히는 게 맞을까. 이름 모르는 노모처럼 지금도 많은 이들이 당시의 아픔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짓는다. 기억을 위한 기억이 아니라, 같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는 눈물짓는 이가 없도록 하기 위해 그때를 기억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더 좋은 세상, 더 안전한 세상을 위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를 담아 세계일보는 세월호 10주기를 앞두고 참사의 현장에 있었거나 매체를 통해 이를 지켜본 시민들의 기억을 담아 봤다.

 

남정실(57)씨는 참사가 벌어진 동거차도 해역과 4㎞ 떨어진 서거차도에 산다. 침몰 지점과 가까워 사고가 일어난 날 바다에서 구조된 생존자들이 옮겨진 곳이다. 남씨는 “당시 구조된 애들한테 라면 끓여 주고 옷도 입혀 줬다”며 “구조자 명단을 파악해야 해서 이름을 물어봤는데 애들이 자기 이름도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2년 정도가 지나서 당시 구조된 애들이 부모랑 같이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며 “이제 더는 배를 못 탄다는 애들한테 살아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고 했다. 진도항을 한참이나 둘러본 남씨는 “10년 동안 정말 많이 변했다”며 “주변을 매립하고 새로운 항구도 만들면서 예전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에서 지인들과 함께 진도항을 찾은 60대 여성은 “예전에 추모하러 안산에 간 적이 있다”며 “그때 본 영정사진 속 아이들의 모습은 밝고 총명했는데, 지금 보니 (진도항 기억관) 사진이 너무 바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침몰해역 찾아 헌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13일 경기 안산 단원고 희생자 조은화 학생의 어머니 이금희씨가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의 침몰 해역을 찾아 헌화하고 있다. 진도=연합뉴스

같은 날 전남 목포 신항. 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세월호가 접안돼 있는 곳이다. 아파트 10층 높이의 거대한 선체는 대부분 붉게 부식돼 있었고, 녹슨 장비에서 나는 삐걱대는 소음이 항구를 가득 채웠다.

 

하해정(54)씨는 “부부 동반으로 여행하던 중 멀리서 녹슨 배를 보고 혹시나 싶어 들렀다”며 “직접 와서 보니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경남 창원에서 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일하면서 라디오를 틀어 두면 세월호를 추모하는 음악이 나와서 펑펑 울기도 했다”며 “어떤 친구는 옛날 얘기하지 말자고 할 때도 있지만, 지겹다고 여기면 안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6년 만에 남자친구와 함께 신항을 찾은 김신영(32)씨는 그사이 더 변해 버린 세월호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멍하니 선체를 바라보던 김씨는 “노란 리본도 빛이 바랬고, 배에는 녹슨 쇠창살만 남아 있는 것 같다”며 “그간 정말 잊고 살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참사 당시 김씨는 막 광주에 있는 사범대에 입학한 터였다. 그는 “당시에는 희생자들이 눈에 밟혀서 동기들과 버스를 타고 진도를 오가며 추모했다”며 “누군가에게는 10년이 긴 세월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과 당일치기 진도 여행을 왔다는 이해린(27)씨는 “벌써 10년이 지난 일이라는 게 안 믿긴다”면서 “추모를 강요할 일은 아니겠지만, 같은 일이 다시 안 벌어지게 하려면 잊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기 안산에는 단원고 학생들의 교실이 ‘4·16 기억교실’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이날 기억교실을 찾은 일본인 고탄다 유이(24)씨는 “집에 돌아오지 못한 게 저였을 수도 있었다”며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고탄다씨는 세월호가 일본에서 ‘페리 나미노우에’로 운항하던 시절 탑승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참사 당시 일본에서도 세월호 뉴스가 많이 나왔다”며 “10주기를 앞두고 참사를 기억하고 싶어서 한국에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고탄다씨는 “작은 화면으로 접하다가 이렇게 교실에 직접 와 보니 희생자 한 명 한 명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며 교실을 한참이나 둘러봤다.

잊지 않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둔 지난 7일 세월호 선체가 접안돼 있는 전남 목포 신항에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힌 노란 리본이 색이 바랜 채 걸려 있다. 목포=최상수 기자

두 자녀와 기억교실을 찾은 김정이(39)씨는 “참사 당시 딸아이가 배 속에 있었다”며 “이곳에서 희생자 어머니를 뵙고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더 내려앉더라”라고 말했다. 남편 김창균(42)씨는 “딸아이가 학교에서 선생님께 세월호에 대해 듣고 얘기해서 찾아오게 됐다”며 “같은 부모로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단원고 희생자 임경빈군의 어머니인 전인숙씨는 “힘들 때마다 이곳(기억교실)으로 아이들을 보러 온다”고 말했다. 전씨는 “참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꿈이 많던 아이들을, 세월호를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진도·목포·안산=이예림·윤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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