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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공권력 피해자들 PTSD, 돈으론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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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29 23:56:17 수정 : 2024-04-29 23: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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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호텔 방에 누워있는 한 남자.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방 안을 뛰어다닌다. 거울을 깨뜨리고 자해를 하는 이 남자는 전쟁 후유증을 앓는 미군 병사다. 베트남전은 끝났지만 그는 아직도 전장을 헤매고 있다. 1979년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한 장면이다.

최근 우연하게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지난해 이맘때쯤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낯선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익숙했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출입 당시 연이 닿았던 A씨였다. A씨는 2022년 진실화해위로부터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로 규명된 한 사건의 피해자였다. 50대 남성인 A씨는 6세였던 1974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뒤 가족들과 50년 가까이 인연이 끊겼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

A씨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소한 시비 끝에 폭행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이다. A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고 해도 A씨는 명백하게 가해자였다. 억울하게 수사를 받고 있다는 A씨에게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진실화해위를 퇴사한 B씨와 사석에서 만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자연스럽게 A씨의 이야기가 화두에 올랐다. 사연을 들은 B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B씨는 “피해자 중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A씨와 마찬가지로 범죄에 연루된 경우부터 알코올 중독에 빠진 사례까지 케이스는 다양했다.

“어린 시절 집단수용을 겪으며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가혹행위에 노출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B씨의 말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이들도 상당수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면서 심리적 피해가 커진 데다 적절한 교육의 기회를 놓침으로써 경제적 여건 또한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1기 진실화해위는 2007년 8월 ‘인권침해사건 피해자 58명 중 28명(48.8%)이 PTSD를 겪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지난 2월 법원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70명이 국가와 부산시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6건에서 국가와 부산시가 원고들에게 총 164억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국가와 부산시의 행위는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에 해당해 원고들의 정신적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반가움에 앞서 씁쓸한 것은 이처럼 피해자가 직접 법적 대응에 나서지 않는 이상 배·보상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가 과거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피해자는 ‘공식 피해자’로 인정받는 것 외에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한다. 경기도와 부산시, 충남도 등 각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피해자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피해 지역에 계속 거주하고 있는 피해자들만 지원 대상에 포함돼서다. 아픈 기억을 뒤로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이들은 구제받을 길이 없다.

다음달 29일 21대 국회 종료가 목전에 오면서, 배·보상 관련 법안 5개는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하고 폐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여전히 지옥 속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의 일상 복귀를 돕는 것은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백준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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