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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25) 그라나다 (3) : 레콩키스타의 완성과 스페인의 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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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4-04-12 15:41:18 수정 : 2024-04-18 14: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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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나라 스페인

스페인은 우리나라와 수교한 지 올해 73주년을 맞은 유럽의 전통우호국이다. 과거에는 투우와 축구의 나라로만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겨 찾는 주요한 유럽 관광지다. 관광뿐 아니라 양국의 경제· 문화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주요한 관심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은진의 ‘에스파냐 이야기’ 연재를 통해 켈트, 로마, 이슬람 등이 융합된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소개한다.

 

그라나다의 항복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즈 1882년 作  ⓒ Salón de los Pasos Perdidos of the Spanish Senate Palace

그라나다는 스페인이 역사의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할 때마다 증인이 됐다. 1492년 1월 2일 그라나다를 지배한 나스리드 왕국의 마지막 술탄인 보압딜은 그라나다 왕국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톨릭 공동 왕(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건넸다. 약 800년간 이어진 이슬람의 아라비아반도 통치가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722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시작된 레콩키스타(국토수복전쟁)는 ‘그라나다의 항복’을 통해 완성되었다. 가톨릭이 이슬람에 승리하게 됐다.

 

이슬람으로부터 되찾아온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그들은 가톨릭에 독실하게 귀의한다. 그라나다에 대한 여왕의 애착은 그 유언에도 나타나 있다. 이사벨 여왕은 생전에 “내 유해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에 있는 성 프란시스 수도원에 안치되기를 희망합니다. 이처럼 명령합니다”라고 했다. 페르난도 왕 역시 그의 유언장에서 왕비의 곁에 묻히기를 희망했다. 그리하여 통일된 가톨릭 왕국 에스파냐를 만든 가톨릭 공동 왕(이사벨과 페르난도)은 그라나다의 왕실 예배당(Capilla Real de Granada)에 묻히게 된다.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필자 제공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에 들어가면 두 사람의 유해를 모셔 놓고 스페인을 세운 국부와 국모로 추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라나다 왕실 예배당 옆을 보면 그라나다 대성당이 서 있다. 무어인으로부터 항복 받고 그라나다를 건네받은 후 1526년부터 무슬림들의 모스크가 있던 곳에 톨레도 대성당을 참조하여 짓기 시작했다. 1706년까지 거의 200년간의 대공사를 거쳐 완공했다. 르네상스 양식의 돔과 고딕 양식의 정면이 결합한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라나다 대성당  필자 제공

왕실 예배당에서 큰길을 건너면 이사벨 라 가톨리카 광장이 나온다. 광장에는 무릎을 꿇은 콜럼버스와 왕좌에 앉아서 콜럼버스의 간청을 허락하는 이사벨 여왕의 모습이 있다. 이는 ‘산타페 항복’을 묘사하는 것이다. 산타페 항복은 가톨릭이 그라나다를 점령한 직후인 1492년 4월 17일 그라나다 부근의 산타페 데 라 베가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톨릭 공동 왕(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아메리카 탐험의 지원을 간청하여 이를 허락받은 문서이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남아있는 산타페 항복 문서 원본 때문에 콜럼버스가 1492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이사벨 라 가톨리카 광장(Plaza Isabel la Catolica)   필자 제공

가톨릭의 힘으로 통일된 스페인 왕국의 자신감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을 후원하고 뒷받침한다. 결과적으로 스페인이 중남미를 지배하여 스페인의 ‘황금시대(Siglo de Oro)’라는 번성기가 열리는 계기가 된다.

 

산타페 항복 문서 원본 ⓒ ARCHIVO DE LA CORONA DE ARAGÓN

그라나다 대성당에서 작은 골목을 빠져나오면 비브람블라 광장이 나온다. 무어인들이 그라나다를 지배하던 때부터 형성된 광장이다. 비브람블라(Bib-Rambla)는 아랍어에서 기원한 이름으로 ‘모래로 된 문’이라는 뜻이다. 그라나다를 흐르던 다로 강의 둑에서 가깝다는 의미이다. 그라나다를 점령한 후 가톨릭은 이 광장을 투우나 승마대회, 심지어 죄인의 공개처형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츄로스 카페와 음식점들이 들어서 있으며, 그라나다에서 가장 번화한 쇼핑 거리가 이어져 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과 그라나다 시내 모습  필자 제공

저 멀리 눈 덮인 시에라 네바다 산맥이 보인다. 그라나다를 빼앗기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무슬림들이 지나간 ‘무어인의 한숨 고개’가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이은진 스페인전문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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