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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이상의 권위 거부”… 그의 문학 정신은 ‘살아 숨 쉰다’

입력 : 2024-03-26 20:38:46 수정 : 2024-03-26 20:3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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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후세대’ 대표 작가 오에 겐자부로 1주기

전후 세대 인권·장애 문제 지적
‘개인적인 체험’ 펴내 찬사 받아
日서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日정부 향해 ‘쓴소리’… 훈장 거부
장편부터 논픽션까지 작품 펴내

“세상이 막 시작되었을 때 까마귀가 지상에 살고 있었다. 까마귀는 땅에 떨어진 콩을 쪼아 먹고 살았는데, 주위가 어두워서 좀처럼 먹이가 보이질 않았다. 이 세상에 빛이 있으면. 까마귀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세상에 빛이 가득 비쳤다.”

아들에게 이름도 지어주고 출생신고도 해야 했지만, 전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들은 뇌 헤르니아로 인한 장애를 앓았다. 의사들은 수술로 삶을 연장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식물처럼 살아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매일 병원에 가서 아들을 보고, 다시 아내가 누워 있는 병실도 찾아야 했다. 유일한 낙은 독서뿐. 우연히 시몬 베유의 책에서 이누이트족의 우화를 읽게 됐다.

반성적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오에 겐자부로가 작고한 지 벌써 1년을 맞았다. 그는 “늘 권력을 반대하는 입장으로 살아왔지만, 소설가로서의 생활보다 상위에 두진 않았다”고 말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베유의 이야기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간절히 희망한다면 이뤄질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한발 더 나아가 진심으로 바라고 원한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고. 그동안 관념의 상상에만 의존한 소설을 써온 그는 문뜩 까마귀의 희망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빛’, 히카리로 지었다.

그는 또 생각했다. 이제 문학을 하는 것과, 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일 모두를 잘 조화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전쟁 같은 삶과, 소설쓰기가 절묘하게 합치되려는 순간이었다. 장애인 히카리의 탄생은 히로시마 방문과 함께 전후 희망이 없는 사회에 맞선 청년들의 절망적 반항을 그려 온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됐다.

오에 겐자부로는 1964년 지적장애를 안고 태어난 자식의 죽음을 바라는 아버지가 정신적 회피 끝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 ‘개인적인 체험’(서은혜 옮김, 을유문화사·사진)을 발표했다.

“‘뇌 헤르니아죠,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져나와 버린 거예요. 내가 결혼하고 이 병원을 짓고 나서 처음 케이습니다. 대단히 드문 케이스라고. 정말 놀랐어요!’ 뇌 헤르니아, 하고 버드는 생각해 보려 했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었다.”

깡마르고 작은 체구의 27세 학원강사 버드는 병원 측의 통보를 받은 뒤 장애를 가진 아이를 맞는다. 절망과 우울에 빠진 그는 장인이 준 조니워커 한 병을 받아들고 여자 친구 히미코의 집으로 가서 현실을 외면하려 한다. 아들의 쇠약사를 희망하며 병원 측의 수술 권유를 거부한 버드는 낙태 전문 의사에게 아이의 처리를 맡긴 뒤 고교 동창생이 운영하는 술집에 갔다가 불현듯 자신이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그를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

출간 직후 전후 세대의 인권 및 장애 문제를 시적인 문장으로 파헤쳤다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진부한 소설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오에는 아이와 함께 살아간다는 결심이 가장 중요하기에 고치지 않겠다고 맞섰다. 미국 출판사 역시 영어판을 펴낼 땐 마지막 부분을 고쳐 써달라고 요청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그 역시 완성도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이와 함께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작품은 작가와 의식을 초월할 수 있다’며 현실과 상관없이 관념의 상상력으로 소설을 써오던 오에에게 현실과 작가적 삶이 투영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진정한 소설가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일본 현대문학의 새 출발을 알린 순간이기도 했다. “히카리가 태어난 후 1년이라는 시간은 내 칠십 평생에 있어서 가장 특별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119쪽)

대표작 ‘개인적인 체험’을 거치면서 진정한 소설가로 거듭나고 마침내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 오에 겐자부로. 작고 1년을 맞아서 ‘개인적인 체험’과 ‘세계문학 단편선-오에 겐자부로’(현대문학),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문학과지성사) 등을 중심으로 그의 문학적 여정과 작품 세계를 재조명한다.

어린 오에는 별채에 사는 할머니로부터 고향 농민봉기를 비롯해 옛날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평소 애매모호한 말을 하는 할머니였지만 이야기를 들려줄 땐 확 달라졌다. 어머니로부턴 ‘허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 같은 책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 세심한 관찰의 중요성을 체험했다. 감나무 잎이 가볍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약동하는 숲 전체를 인식하게 된 뒤, 잘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선생님께 야단맞은 일을 계기로 세심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스스로 터득한 내 소년 시절의 지혜였습니다.”(‘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23쪽)

고교를 전학간 그는 새 학교에서 평생의 친구 이타미 주조를 만나 문학의 숲으로 들어선다. 이타미로부터 여러 문학적 영감을 받았고, 나중에 그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그 스스로 “내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만남이었다”고 회고했다.1954년 도쿄대 불문학에 입학한 뒤에는 평생의 은사 와타나베 가즈오를 만난다. 와타나베로부터 휴머니즘과 함께 ‘톨레랑스’, 관용의 정신을 배웠다.

스물두 살의 오에는 1957년 첫 단편소설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도쿄대 대학신문에 발표했다. 작품은 개를 도살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청년이 일을 하면서 자신이 수렁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는 내용이다.

1935년 일본 시코쿠 에히메현의 산골짜기 마을 오세무라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다섯째로 나고 자란 오에 겐자부로는 1957년 ‘기묘한 아르바이트’와 함께 단편소설 ‘죽은 자의 오만’을 잡지 ‘문학계’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듬해 ‘나’라는 소년의 시선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사육(飼育)’으로 아쿠타가와상을 거머쥐었다. 그해 첫 장편소설 ‘싹 뽑고 새끼 솟기’와 단편집 ‘보기 전에 뛰어라’를 잇달아 출간하며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오에는 이후 만엔 원년인 1860년 시코쿠의 골짜기 마을에서 일어난 민중 폭동과 100년 후인 1960년 안보투쟁을 배경으로 공동체의 폭력에 상처받은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낸 또 다른 대표작 ‘만엔 원년의 풋볼’을 비롯해 수십 권의 장편소설, 단편소설, 논픽션, 에세이, 평론 등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많은 작품을 펴냈다. 논픽션으론 ‘히로시마 노트’와 ‘오키나와 노트’ 등이 유명하다.

‘만엔 원년의 풋볼’ 등으로 1994년 10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후 26년 만에 일본인으로서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 수상 직후 일본 정부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지만, 그는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 이상의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수상을 거부했다.

오에의 육신은 지난해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의 문학 정신은 여전히 도쿄 세이조 자택 2층 안쪽의 서재에 서성거릴 것이다. 전날 밤 화장실에 다녀오는 히카리의 담요를 덮어주는 것으로 일과를 마감한 그는 다음날 오전 7시면 다시 일어나 생수 한 잔을 마시고 펜을 든다. 주제를 정한 뒤 매일 조금씩, 중단하지 않고 글을 써나간다. 어느 순간 갑작스러운 비약,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며 펜을 절박하게 붙잡고.

“대개 소설을 창작해가는 도중에 어떤 소설이라도 자체적으로 궤도를 그리게 되고 그 궤도를 타고 계속 정진해나가지요. 그런데 그 궤도에 올라 달리는 가운데 소설 자체가 탄력을 받아 지금까지 달리던 평면에서 이륙하는 순간이 있어요. 이륙하면 그 추세를 타고 날아가면 되지요. 이렇게 이륙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 325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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