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28층에 걸린 검은 종이…속옷만 입고 2평 공간 갇힌 노인 극적 구조

손잡이 고장난 화재대피공간에 20시간 갇혀
검은 상자 칼로 긁어 ‘SOS’…라이터로 불빛도

지난달 인천의 한 아파트 대피공간에 갇힌 70대 노인이 만든 구조 요청 종이. 인천경찰청 제공

실수로 아파트 내 대피공간에 갇힌 70대 노인이 기지를 발휘해 20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사연이 전해졌다.

29일 인천경찰청에 따르면 지난달 1일 오후 1시쯤 112 치안종합상황실에 “맞은편 동 외벽에 ‘SOS’라고 적힌 종이와 밧줄이 걸려 있다”며 인천 도화동의 한 아파트로 출동해달라는 다급한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미추홀경찰서 도화지구대 소속 경찰관 7명은 이날 최단 시간 안에 출동해야 하는 ‘코드1’ 지령을 상황실로부터 전달받았다. 급히 출동한 경찰관들은 현장에 도착해 아파트 고층 외벽에 ‘SOS’라고 쓰인 종이 한 장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 정확히 몇 층인지 알기가 어려웠고, 경찰관 일부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협조 요청을 했다. 동시에 나머지 경찰관들은 15층부터 세대마다 초인종을 눌러 구조 요청자를 찾기 시작했다.

대부분 곧바로 응답했으나 28층 한 세대만 여러 번 누른 초인종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경찰은 관리사무소를 통해 28층 집주인 아들의 휴대전화 번호를 파악했다. 경찰관들은 집주인 아들로부터 비밀번호를 알아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안방과 화장실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이에 집 안 내부를 수색하던 중 주방 안쪽에서 “여기요. 여기요”하는 작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불이 났을 때 몸을 피하는 대피 공간으로, 손잡이는 고장이 나 열리지 않는 상태였다.

경찰이 방화문 손잡이를 파손해 들어갔더니 2평(6.6㎡) 남짓한 작은 공간에 속옷 차림의 70대 A씨가 서 있었다. A씨는 “할아버지, 괜찮으시냐”는 경찰관의 말에 “추워서 얼어 죽을 뻔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혼자 사는 A씨는 환기하려고 대피 공간에 들어갔다가 안에서 방화문이 잠겨 전날 오후 5시부터 20시간 넘게 갇혔던 것으로 확인됐다. 휴대전화도 없어 한겨울에 꼼짝없이 작은 공간에 갇힌 그를 구한 건 주변에 있던 검은색 상자와 칼이었다. A씨는 상자의 검은색 종이 부분을 칼로 긁어 ‘SOS’라는 글자를 만들었고, 줄을 연결해 창문 밖으로 내걸었다. 또 라이터를 켰다가 끄면서 불빛을 내기도 했다.

그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시라”는 경찰관들의 권유에도 “그 정도는 아니다”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당시 출동한 임용훈 도화지구대 4팀장은 연합뉴스에 “출동 지령을 받고 처음에는 누군가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며 “33년 동안 근무하면서 이런 신고는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잘 보이지도 않는 고층 아파트 창문에 붙은 ‘SOS’ 글자를 맞은편 동에 사는 주민이 보고 신고했다”며 “젊은 남성분이었는데 정말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김수연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