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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워킹맘의 ‘친정 엄마 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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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9-14 22:40:59 수정 : 2020-09-14 22: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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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공유 ‘다른 엄마’ 관습 존재
손자녀 생존 도움 ‘할머니 효과’
워킹맘, 친정 엄마 의존은 최선
미안해 말고 양육 감사 표시를

올가을 학기 초, 비대면(非對面)으로 진행 중인 대학원 세미나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학원생 중에는 전일제 학생 못지않게 학업과 취업을 병행 중인 워킹맘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중 한 학생이 공부도 해야 하고 재택근무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돌봐야 하는 비상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피난(?)을 왔노라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울컥하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긴장과 갈등이 더욱 가중된 상황임을 감안한다 해도, 여전히 아이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엄마 자신의 몫이요,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친정엄마라는 현실이 답답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순간 울컥했던 것 같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문을 닫은 상황에서 친정이든, 시댁이든 아이를 믿고 맡길 곳만 있으면 감지덕지해야 함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말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워킹맘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딸의 인생을 위해 또 다른 여성인 엄마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 미안하고 안타까울 뿐’이라고. 한데 이 대목에서 잠시 모성을 주제로 역사적?문화적 상상력을 발휘해도 좋을 것 같다. 여성들은 전업 엄마 역할이 불가능할 경우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양한 대안을 모색해 왔음을 기억할 일이다. 일례로 라틴아메리카 문화 속에는 할머니들을 비롯하여 여타의 여성 친족들과 모성을 공유하는 관습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엄마를 대체하는 ‘다른 엄마들(other mothers)’의 존재가 전혀 낯설지 않은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부 중심 핵가족이 보편화되기 이전까지는 가족 안에 자녀를 돌보아 줄 ‘다른 엄마들’이 늘 함께했었다. 집집마다 할머니도 계셨고, 전일제 가사 도우미(가정부)들도 흔했고,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서는 (주로) 맏딸이 엄마를 도와 동생들을 돌봐주곤 했다. 아이는 ‘엄마 혼자 키운다’가 아니라 ‘힘 닫는 대로 함께 키운다’는 집단주의적?공동체적 가치가 자연스럽게 생활화되어 있었던 셈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생식능력이 끝나는 순간 수명을 다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인간과 범고래, 들쇠고래, 흰고래, 일각돌고래 등 다섯 종의 동물만은 예외라는 것이다. 폐경기 이후에도 오랜 기간 살아 있는 이유는 다음 세대를 양육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핵심적 주장이다. 실제로 농경사회에서는 출산을 담당했던 젊은 여성들이 농사일도 해야 했기에 자녀양육은 대개 할머니들 몫이었으리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범고래의 세계에서도 할머니 범고래가 살아 있으면 손주 고래들의 생존율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된 바 있다. 할머니의 존재가 손자녀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동시에 양육에 실질적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일컬어 ‘할머니 효과’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 만큼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는 워킹맘이라고 해서 지나치게 죄책감을 가진다거나 과도하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대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할머니(들)이 계심을 감사해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보다 지혜로운 전략이 아니겠는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먼 친족이나 천주교의 대모나 보모보다는 생물학적 할머니가 엄마를 보완하는 양육자로 보다 선호된다고 한다. 엄마 입장에서는 할머니가 자신의 자녀를 돌볼 때 “보다 평화롭게 일에 전념할 수 있노라” 응답했다니 말이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모성의 다양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엄마 홀로 고립된 집에서 아이의 양육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옛날부터 그렇게 해온 자연스러운 방식도 아니요 유일한 방식도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기 위함이다. 좋은 엄마의 기준이나 바람직한 자녀 양육 방식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 왔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다채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좋은 엄마가 되는 길도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고 자녀 양육 방식 또한 언제든 변화 가능함은 물론이다.

현재 워킹맘의 입장에서는 친정엄마 찬스(?)를 사용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하지만, 막상 친정엄마에게 의지를 할 때 따라오는 부담도 만만치가 않다. 친정엄마 입장에서도 할머니 역할의 재미와 의미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늦은 나이에 손자녀 돌보는 데 얽매인 채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워킹맘에게는 자녀양육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바구니가 최소 3개 이상은 되어야 한다는 조언을 들려주고 싶다. 첫 바구니는 물론 아빠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는 것이다. 스스로 좋은 아빠라고 생각할수록 자존감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는,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가 활성화된 상황에서 굿 뉴스임이 분명하다. 두 번째 바구니는 이미 가족생활의 상당 부분이 상품화되어 있는 만큼 이 또한 적극 활용하라는 것이요, 세 번째 바구니 속에는 할머니 효과의 긍정적 효과를 믿고 슬기롭게 적응해 보라는 것이다. 결국 워킹맘 입장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선택지가 다양해질수록 친정엄마 생각에 울컥해지는 마음도 점차 엷어질 것 같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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