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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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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8-24 22:35:34 수정 : 2020-08-24 22:3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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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로 권력자 뽑는 민주주의는 선동과 포퓰리즘에 매우 취약
권력의 독단과 전횡을 막으려면 국민 각자가 자기 몫 실천해야

말과 사슴이 싸움을 벌였다. 말은 사냥꾼을 찾아가 사슴에게 복수하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사냥꾼은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사슴을 쫓을 수 있도록 등 위에 안장을 얹고, 고삐로 너를 조종할 수 있도록 입에 마구를 채워야 해.” 말은 기꺼이 동의했다. 드디어 사냥꾼이 사슴을 물리치자 말이 말했다. “이제 그만 내려와요. 입과 등에 채운 것도 풀어주세요.” 사냥꾼이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이제 막 마구를 채웠잖아. 난 지금 이대로가 좋아.”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말과 사냥꾼의 우화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처한 실상을 대변해 준다. 정치인은 사냥꾼처럼 자기에게 권력을 몰아주면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다고 떠벌린다. 하지만 권력을 잡으면 생각이 달라진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국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 건설’을 약속했다. 대통령에 오른 그는 무서운 독재자로 변했고 결국 나라가 망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페루를 더 나은 나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파괴했다.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터키의 레제프 에르도안,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도 똑같은 독재자의 전철을 밟았다.

배연국 논설위원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다. 우리 국민이 처한 현실이 사냥꾼에게 고삐를 잡힌 말 신세가 아닌가.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를 뿌리 뽑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권력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권좌에 오르더니 스스로 천명한 ‘국민 통합’, ‘겸손한 권력’을 헌신짝처럼 내던졌다. 국민을 쪼개고 삼권분립의 보루를 허물었다.

요즘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주로 투표를 통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대중적 지지를 중시하는 민주주의가 선동과 포퓰리즘에 취약한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 선전책임자 요제프 괴벨스의 말처럼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는 큰 거짓말을 잘 믿는다. 집권층의 거짓말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우리 국민이 바로 그 짝이다.

미국 하버드대 정치학자 두 명이 저술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선 독재자를 감별하는 4개의 리트머스 시험지를 제시한다.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폭력을 용인하며, 언론의 자유를 비롯해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는지를 유심히 살피라는 것이다. 이 중 하나만 양성반응을 보이더라도 독재의 위험이 있다고 한다. 국민의 뜻을 앞세워 개혁을 밀어붙일 때 특히 조심하라고 충고한다.

문재인정부는 리트머스 테스트에서 4곳 모두 양성반응을 나타낼 공산이 크다. 집권층은 민주규범뿐 아니라 정의, 공정, 양심 등의 도덕규범까지 무너뜨린다. 선거제도를 멋대로 고치더니 헌법까지 자기 입맛대로 바꾸겠다고 한다. 입법부와 사법부는 감시견에서 애완견으로 추락했다. 경쟁자의 존재는 애초 안중에 없다. 적으로 공격하고 짓밟는 일이 허다하다. 자신들의 폭력과 불법은 묵인하고 상대의 위법엔 몽둥이를 휘두른다. 비판적인 기자들을 명예훼손이나 검언유착으로 몰아 언론 자유를 억압한다.

문재인정부의 농단은 자신들이 적폐로 내몬 전 정부보다 심하다. 국민은 공수처, 부동산감독기구와 같은 희대의 괴물까지 마주할 처지에 놓였다.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집권층은 전 정권을 내쫓더니 국민의 등에 안장을 얹고 고삐를 채우기 시작했다. 민주화를 부르짖던 운동권이 민주주의를 잡는 사냥꾼이 되고 있다. 농단을 방치하면 국민은 사냥꾼의 노예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는 것처럼 독립할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독립국의 열매가 있고, 노예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민족에게는 망국의 열매가 있다”고 말했다. 작금의 권력 농단은 국민의 책임이 크다.

많은 국민이 지난 정부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뜨거운 마음으로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나라를 반듯이 세우려면 뜨거운 가슴만으로는 어렵다. 지금은 차가운 이성을 소환할 시점이다. 이성의 눈을 뜨고 권력의 독단과 전횡을 똑똑히 살펴야 한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배연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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