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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동지 ‘인동초’ 곁으로 떠난 이희호 여사

입력 : 2019-06-11 06:00:00 수정 : 2019-06-11 01:4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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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 / 고 김대중 대통령의 평생 동지 / 여성·민주·평화의 삶 /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 1월 1일 이희호 여사가 서울 마포구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인사말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이희호 여사는 남편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부딪힌 험난한 생의 여정을 마감했다. 이 여사는 일제 치하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결혼 전에는 독신을 고집하며 유학을 다녀온 뒤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활약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선 후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며 험로를 걸었지만, 대통령의 영부인이라는 영광을 맛보기도 했다. 단순히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의 내조자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옥바라지로, 망명 때는 후견인으로, 가택연금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지라는 평을 받았다.

 

남편이 떠난 후에도 동교동 178-1번지 자택에 걸려있던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 여사도 파란만장한 삶을 접고 ‘인동초’ 김대중의 곁으로 돌아갔다.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1997년 12월 19일 일산자택을 나서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이희호 여사가 집밖에서 기다리던 당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독신 여성운동가에서 정치인의 아내로 

 

이 여사는 1922년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 씨와 어머니 이순이 씨 사이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 여사는 기독교 집안에서 유복하게 성장해 일제 치하에서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다녔다. 1950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 램버스대와 스카렛대에서 유학했다. 

 

1958년 귀국한 그는 대한YWCA 총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아 남녀 차별적 법 조항을 고치기 위한 활동에 힘썼고, 여러 여성단체가 모여 출범한 ‘여성단체협의회’ 조직화에도 앞장섰다.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는 1962년 만 40세의 나이로 김 전 대통령과 운명적 결혼을 하면서 ‘정치인 아내’의 길에 들어섰다. 첫 부인과 사별한 그와 우연히 재회해 결혼에 이른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 씨와 결혼해 홍일, 홍업씨를 얻었지만 차 씨는 1959년 세상을 떠났다. 주변에서는 ‘정치 낭인’에 불과한 김 전 대통령과의 결혼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이 여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여사는 후일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라고 밝혔다. 1963년 3남 홍걸씨를 낳았다.

 

1993년 8월 12일 김대중씨가 자택에서 이희호 여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연합뉴스

◆내조자에서 동지로

 

결혼 열흘 만에 김 전 대통령이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는 등 이 여사의 시련은 시작됐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후 미국 망명(1972년), 납치사건(1973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귀국 후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군사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남편의 수감 시절 면회 시간이 한 달에 20분 밖에 되지 않자, 이 여사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가족이 보낸 900여통의 편지와 김 전 대통령의 옥중서신이 각각 출판됐다. 

 

김 전 대통령과 이 여사가 연금 기간 도청을 우려해 중요한 대화를 필담으로 주고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정치적 해금이 이뤄지자 13대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고, 1992년 14대 대선 역시 실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1997년, 네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대통령 당선의 꿈을 이뤘다.

 

이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어둡고 쓸쓸한 감옥과 연금의 긴 나날들, 이국에서의 망명 생활 등은 신산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남편이 차디찬 감방에 있는 기간에 홀로 기도하고 눈물로 지새운 밤도 많았다. 독재는 잔혹했고, 정치의 뒤안길은 참으로 무상했다”라고 적었다.

 

2000년 12월 11일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가 숙소인 그랜드호텔 발코니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오슬로시민들에게 손을 맞잡고 답례인사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노벨평화상부터 아들 비리까지

 

청와대 안주인이 된 이 여사는 아동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두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김대중 정부에서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의 공직 진출이 확대되자 ‘국민의 정부 여성 정책 뒤에는 이희호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이 여사는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남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기억했다.

 

그러나 대통령 재직 중에도 시련은 계속됐다. 바로 ‘홍삼 트리오’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아들들의 비리 문제였다. 이 여사는 2002년 3남 홍걸씨에 이어 차남 홍업씨까지 연달아 구속되는 참담함을 맛봐야 했다.

 

이 여사는 이때를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보다 더 힘들었던 때이자 악몽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사는 “내가 죄인”이라며 가슴을 쳤다.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통해 정권 재창출을 이뤘지만 퇴임과 동시에 이뤄진 ‘대북송금 특검’으로 또 한 번 난관을 맞기도 했다.

 

이 여사는 2009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평생 가까운 47년 부부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에도 그는 햇볕정책의 계승자로서 활발한 활동에 나서고, 매년 노벨평화상 수상 축하 행사를 개최하는 등 남편의 유업을 잇는 데 힘을 쏟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2015년 7월에도 취약계층 의료 지원을 목적으로 방북했지만 기대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과의 면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 ‘동행’에서 “참으로 먼 길을 걸어왔다. 문득 돌아보니 극한적 고통과 환희의 양극단을 극적으로 체험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회고했다.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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