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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사회로 가는 길] "참아야죠…직장인치고 갑질 안 당하는 사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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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5-15 21:08:22 수정 : 2018-05-15 2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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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상사 갑질에 우는 직장인들 / 업무外 지시에 술시중·성희롱까지… 항변도 못하고 속앓이만

 

물벼락에 욕설·고함 세례 등 최근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 행태가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직장 내 갑질’이 도마에 올랐다. 그동안 침묵을 강요당한 을들이 참다 못해 폭로한 녹취록, 영상 등에는 갑들조차 빼도 박도 못하는 적나라한 실태가 공개됐다. 일자리를 볼모로 한 직장에서 약자를 상대로 수없이 되풀이된 갑질에 좀 더 날카로운 감시의 칼날을 들이댈 때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더욱더 귀담아듣고, 부당한 갑질을 일벌백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다.



◆상사자녀 ‘자소서 첨삭’에 ‘룸살롱 회식’ 강요까지

금융권 대기업에 종사하는 A씨는 취업 준비 중인 자녀의 자기소개서를 봐 달라는 상사의 요구에 한동안 시달렸다. 직원들에게 자녀의 자소서 첨삭을 부탁하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보통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사 주면서 “자식 농사가 참 마음대로 안 된다”며 푸념을 늘어놓다가 부하 직원이 이에 동조해 주면 자소서 작성을 도와달라고 하는 게 ‘전형적인 레퍼토리’라고 A씨는 말했다. 아예 텅 빈 자소서 양식을 건네며 내용을 채워달라는 경우, 수정을 부탁하는 경우 등 다양했다.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완곡히 거절해도 인사고과를 맡은 사람이 한사코 부탁하면 외면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결국 팀을 옮기지 않는 이상 벗어나기 힘든 고통이라는 설명이다.

대기업 영업직으로 일하는 B씨는 신입사원 시절 상사의 강요로 접대 여성이 나오는 고급 룸살롱 회식을 하며 불편함을 느꼈다. B씨는 “인턴이나 신입이 들어오면 과시하려는 목적인지 이런 술집에 꼭 데려간다”며 “같은 남자라도 당혹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어깨동무를 시키고 동성 간 입맞춤 강요 등 불쾌한 상황이 이어진다”고 밝혔다. 신입사원 때부터 이런 분위기에 노출시켜 술 강권 문화와 스킨십 강요 등을 학습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결국 처음엔 ‘피해자’였던 이들이 ‘공범화’되는 단계로 발전한다. 새로운 피해자가 계속 양산되는 구조다.

계약직은 직장 내 갑질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16년 지방의 한 의료기관에서 일하던 C씨는 무기계약직 전환을 앞두고 부당한 해고를 당했다. 2년의 계약기간을 채웠고, 근무에 결격사유가 없었지만 인사결정권자였던 담당 실장은 C씨의 근무 성적을 최하위로 평가해 계약 연장을 막았다. C씨는 “실장의 이 같은 결정을 알게 된 순간 동료들도 일제히 그만둘 직원을 왕따시킨다”며 “내가 있던 자리엔 당시 그 지역 유지가 청탁한 인물이 채용된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감사원에 신고했지만 문제 해결은커녕 감사원 측이 C씨의 신분을 회사에 알려주는 바람에 또 다른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10명 중 8명 “갑질 경험”… 대부분 그냥 참는다

사례 취재를 위해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한두 가지를 꼽기 힘들다. 직장인치고 갑질 안 당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세계일보가 취업포털 사람인과 지난 10∼14일 직장인 864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 응답자의 78.5%가 ‘직장 상사로부터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중 76.1%(그냥 참았다)가 대처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켜야 했다. 갑질을 참은 이유(복수응답)로는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71.7%), ‘더 큰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51.9%) 등이 꼽혔다. ‘회사 측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6.5%)하거나 ‘익명 게시판, 노동부 등에 신고’(2.7%)했다는 응답은 합쳐서 10%가 되지 않았다.

상사의 갑질 유형으로는 ‘부당한 업무 지시’(61.7%)가 가장 많았다. ‘실적뺏기’(19.9%)와 ‘선물 및 접대 요구’(5.9%) 등도 4명 중 1명꼴로 당했다. 술자리에서 갑질 경험을 묻는 질문에는 ‘억지로 술 권하기’(28.5%), ‘집에 못 가게 붙잡기’(24.7%) 등이 최악의 사례로 꼽혔다. ‘회식 때 분위기 띄우기 강요 및 성희롱’으로 불쾌했다는 경우도 31.4%나 됐다.

최근 대한항공 사태로 부당한 갑질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지만, 갑질이 근절되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응답자의 75.7%가 ‘잠깐 잠잠해졌다가 다시 생길 것’이라고 전망했다.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는 응답도 15.6%에 달했다.

◆24시간 ‘갑질 폭로’… 행동 나선 ‘을’

이 같은 갑질을 견디다 못한 직장인들이 최근 신문고 두드리듯 찾는 곳이 ‘직장갑질119’다. 지난해 11월 출범한 이 단체는 노동 전문가와 노무사, 변호사 등 241명이 무보수로 활동하고 있다.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과 이메일 등을 통해 직장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와 갑질을 제보받고 상담해준다.

이곳에 모인 900여명(14일 기준)의 직장인들은 “노동부는 믿을 수 없고, 가족이나 지인들에게 털어놓아도 공감받기 어렵더라”며 익명 채팅방에서 말문을 열었다. 14일 하루 동안에만 A4 용지로 110페이지 분량에 달하는 제보와 상담이 이루어졌다. 24시간 내내 쉴 틈 없이 새로운 폭로가 이어졌다. 갑질에 대한 문제 제기를 했을 때 회사 측이 진상파악보다 ‘제보자 죽이기’에 먼저 나서는 정황들도 속속 포착됐다. 전산실 직원을 추궁해 제보자 IP(인터넷주소)를 추적하거나 직원 간 이간질을 시켜 제보자를 고립시키는 행태 등이 대표적이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윤지영 변호사는 “오픈 채팅방을 지켜보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고 만연한 갑질 실태에 놀랐다”며 “제도적으로 이에 대응하기 힘든 부분이 무기력할 때도 있지만 이런 공간을 통해 ‘직장 내 민주주의’ 실현에 첫발을 뗐다는 건 중요한 변화”라고 밝혔다. 갑질에 시달린 직장인들에겐 “개개인의 대응이 쉽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문제 제기하며 바꿔갈 수 있다. 자책하기보다 용기를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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