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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미루나무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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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7 00:29:24 수정 : 2018-04-27 09: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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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역사적 판문점 대좌 / 김정은 손에 든 ‘평화의 올리브’ /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무도 몰라 / 올빼미 지혜로 미리 위험 대비해야 판문점이 활짝 열렸다. 오늘 평화의 집에서 남북 정상이 역사적 대좌를 갖는다. 격랑의 한반도에 마침내 얼음이 풀리고 평화의 꽃봉오리가 부푼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이 평화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판문점은 남북이 군사적 갈등을 빚을 때마다 서로 험구를 주고받던 곳이다.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를 치던 유엔 경비병들에게 도끼를 휘두른 살인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런 비극의 최전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루나무 대신 올리브 가지를 들고 등장한다.
배연국 논설실장

북한은 정상회담의 사전조치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를 선언했다. 뒤이어 남북은 휴전선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했다. 양쪽이 긴장 완화에 나선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나 평화의 노정은 멀고도 험하다. 김정은의 공언만으로 하루아침에 자갈길이 아스팔트길로 바뀔 리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10년 전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까지 폭파하고도 몰래 핵을 개발해온 전력이 있다. 김정은은 불과 넉 달 전까지만 해도 “핵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큰소리쳤다. 이복형을 테러로 암살하고 고모부를 고사포로 쏴 죽인 장본인이다. 그 독재자가 지금 평화를 얘기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럽다.

김정은이 내민 올리브 가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판단은 일단 유보하자. 올리브는 올리브의 신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올리브는 그리스로마신화에서 미네르바의 나무로 불린다. ‘지혜의 신’ 미네르바는 평화의 징표로 올리브를 손에 쥐고서 어깨엔 올빼미를 올려놓고 있다. 올빼미는 여신의 지혜를 상징한다. 평화를 지키려면 사물을 꿰뚫어보는 올빼미의 눈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리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올빼미의 혜안을 가진 정치인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었다. 1938년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의 일부를 떼어주는 뮌헨협정문을 흔들며 “영광스러운 평화”라고 외쳤다. 처칠은 히틀러가 건넨 가짜 올리브를 들고 반색하는 체임벌린을 향해 “이리떼에게 작은 고기 덩어리를 던져준 것”이라고 꼬집었다. 1년 후 처칠의 예상대로 이리떼는 탱크를 몰고 체코와 폴란드를 집어삼켰다. 평화는 의지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적의 거짓 평화에 속지 않고 지혜롭게 처신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김정은의 비핵화 약속은 현재로선 낙관하기 어렵다. 그의 올리브가 히틀러의 경우처럼 가짜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라면 어느 한쪽을 예단해 부화뇌동하기보다는 불확실한 미래에 철저히 대비하는 게 옳다.

누구든 자기 목숨을 놓고는 도박하지 않을 것이다. 99%의 안전이 보장될지라도 1%의 사망 위험이 있다면 목숨을 걸지 않는다. 하나뿐인 목숨을 잃으면 전부를 잃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도 마찬가지다. 북핵은 국가의 존립과 5000만 국민의 생명이 걸린 중대사다. 김정은이 실제로 북핵을 폐기할 확률은 99%보다 훨씬 낮을 것이다. 그런 불확실성에 국가의 목숨을 내맡겨선 안 된다. 남북대화를 하더라도 안보태세는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

철학자 헤겔은 그의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 나래를 편다”고 말했다. 세상의 일들은 인간의 짧은 식견으로 결과를 미리 알 수 없다. 그 일이 맞고 틀리냐는 뚜껑을 덮고 나서야 판가름이 난다. 그러니 하루의 일과가 모두 끝난 황혼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헤겔의 생각이다. 남북의 판문점 대좌 역시 그렇다. 결과의 성패가 드러나는 황혼녘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 그때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유비무환의 정신이다.

준비 없는 평화는 위험하다. 올빼미는 비바람이 불기 전에 질긴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둥지의 구멍을 막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상토주무(桑土綢繆)이다. 오늘 정상회담을 맞는 우리 국민이 갖출 안보 자세가 아닐까. 한반도에는 앞으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다. 폭풍이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로 느슨해진 안보의지를 동여매야 한다. 미리 대비하면 후환이 없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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