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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세대인 정은과 여정 / 증오 대물림되는 건 옳지 않아 / 책상 위의 핵 단추 내려놓고 / 부디 화해의 남쪽 손 잡기를 정은아!

민족의 운명을 손에 쥔 나의 손주, 정은아! 이 할애비의 편지를 읽어 보거라.

지금 조국 한반도엔 영하의 추위가 한창이겠지. 여기 천상에는 얼음이 어는 일이 없단다. 사시사철 봄날이야. 만물이 활동하기에 가장 알맞은 온도에 맞춰져 있지. 환경과 조건이 최상인 그야말로 천상이지.

여기도 괴로움은 있단다. 스스로 부른 죄과를 받는 일이지. 천상에는 수많은 영혼들이 살고 있단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모두 천상으로 오는 거야. 좋은 영혼을 만나는 건 반가운 일이지.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영혼들을 매일 대하는 건 끔찍한 일이야. 천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는 히틀러라네. 600만 유대인의 영혼이 밤낮으로 그에게 원망과 저주를 쏟아낸다고 생각해 보라구. 나도 지상에서 전쟁과 숙청으로 죽인 영혼으로부터 온종일 시달리고 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 그러나 죽을 자유가 없는 게 바로 이곳이야. 그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원래 하느님은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 지옥불 같은 것을 만들지 않으셨네. 사랑의 신께서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채찍을 드시겠나. 천상의 기쁨과 고통은 모두 인간이 업보로 자초한 것이야.

손주 정은아! 내가 가장 후회하는 두 가지가 있단다. 젊은 혈기에 통일을 하겠다고 6·25전쟁을 일으켜 사람들을 죽게 만든 일이지. 다른 하나는 30년 전 이 땅에서 지구촌의 잔치가 벌어졌을 때 축하를 해주지 못한 일이다. 편협한 생각으로 서울올림픽에 선수들을 보내지 않았지. 소련과 중국마저 이념을 내려놓고 참가한 마당에 나만 뿌리친 거야. 세계인들의 눈에 어찌 비쳤겠나.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야.

이번 평창에는 선수와 응원단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맙구나. 할애비가 못한 일을 손주가 대신 해줘서. 손녀 여정이도 오늘 개막식에 참석한다지. 정말 잘한 일이야. 민족의 경사이니 마음껏 축하해 주라구. 평화공세니 외교 전략이니 하는 생각일랑 버리거라.

너희 오누이는 88올림픽 세대이지. 여정이는 올림픽 무렵에 태어났을 테고, 너는 아마 다섯 살이었지. 네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깨춤을 췄던 기억이 떠오른단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보고 다들 장군감이라고 칭찬했었지.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그때 올림픽은 정말 대단했어. 온 세상이 냉전을 멈추고 올림픽 주제가의 노랫말처럼 서로 손에 손을 잡았지. 동서 분쟁이 그때 막을 내렸지만 동족 간의 갈등은 30년이 흐른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순박한 아가의 미소를 짓던 너희에게까지 증오와 적개심이 대물림되고 있으니. 그 비극의 고리를 지금 끊어라. 그러지 않으면 증오는 너희 자식 세대에게로 또 대물림된단다.

사랑하는 정은아! 너의 지난번 신년사를 듣고 깜짝 놀랐단다.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 있다”고 말했지. 인민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너의 마음은 이해한단다. 물론 나도 예전엔 외세를 막는 길은 핵밖에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 천상에서 와보니 그게 아니더구나. 핵은 인민의 목숨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야.

핵은 너의 인민과 남쪽의 인민과 세계의 인민을 모두 재앙으로 모는 길이란다. 한반도가 통째로 날아가는 참극을 부르는 일이야. 반만년 이어져온 민족의 핏줄이 네 대에 끊어지게 해선 안 된다. 당장 책상에서 핵 단추를 치우거라.

배연국 논설실장
할애비는 남북이 화해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화해와 평화의 화(和)는 쌀(禾)을 입(口)으로 먹는다는 뜻이지. 밥상에 둘러 앉아 도란도란 밥을 먹는 모습이 평화라는 것이야. 남북이 그렇게 지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니?

나의 손주 정은아!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러야 사람들의 비명을 들을 수 있겠니?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어야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겠니? 이번에 여정이가 가거든 남쪽의 손을 꼭 잡거라. 30년이 걸린 손이다. 부디 그 손을 놓지 말거라.

※1994년 사망한 김일성이 천상에서 지상의 김정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남북의 비원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배연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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