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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찬의 軍]대한민국에서 국방장관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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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0-21 11:00:00 수정 : 2017-10-21 0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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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월 미국의 제8대 국방부 장관에 취임한 로버트 맥나마라는 하버드 대학에서 MBA를 취득하고 포드 자동차에 입사해 최고경영자(CEO)의 자리에 오른 경제통이었다. 그런 그가 1961년 1월 미국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자 많은 사람들은 “국방에 대한 지식이 적은 사람이 업무를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는 국방정보국(DIA)과 국방조달청(DSA)을 설치해 정보와 군수 분야를 체계화했으며, 통계적 기법을 사용해 국방 업무와 무기 획득 절차를 효율화했다. 효율성이라는 측면을 도외시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국방 업무 체계를 획기적으로 개편함으로서 현대 미국 국방 발전의 초석을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지난 3일 육군훈련소를 방문한 송영무 국방장관이 병사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배식을 받고 있다. 국방부제공

조지 H. W. 부시 미국 행정부 시절인 2006년 12월 제22대 미국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 로버트 게이츠는 중앙정보국(CIA)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이라크전쟁을 주도했던 도널드 럼스펠드 전 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그는 수렁에 빠진 이라크전쟁을 수습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국방장관에 유임돼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양측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반면 60여년 동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국방 분야에서 뚜렷하기 기억되는 국방장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아랍 국가들과 수시로 충돌을 거듭했던 이스라엘은 모세 다얀, 아리엘 샤론, 에후드 바라크 등 군대와 민간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고 국방장관을 역임해 국민들의 존경을 받은 인사들이 존재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 좋게 기억된 국방장관을 찾기 힘든 우리나라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취임한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 이후 지난 7월부터 임기를 수행하는 송영무 장관까지 우리나라의 국방을 책임졌던 국방부 장관은 45명이다.

이 가운데 일반 국민들에게 능력과 인품 등에서 긍정적인 인상으로 기억된 장관은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6.25 당시 국방부를 맡았던 신성모 2대 장관은 전쟁 전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며 북진통일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정작 6.25가 발발하자 한강 이북의 육군 병력과 시민들을 버려두고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함께 피난했다. 6.25 전쟁 기간인 1951~1952년에 재임했던 이기붕 3대 장관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가족과 함께 자살했다. 이후 1961년 5.16 쿠데타 직후까지 국방부 장관은 최대 6개월의 임기조차 마치지 못하고 교체를 거듭했다.
12.12 쿠데타 당시 중앙청에 진주한 전차가 전방을 경계하고 있다.

박정희정부가 출범하면서 국방부 장관은 평균적으로 2년 안팎의 임기를 수행하며 업무를 안정적으로 수행했다. 덕분에 15대 김성은 장관(1963년 3월~1968년 2월)과 20대 서종철 장관(1973년 12월~1977년 12월)처럼 장수 장관도 탄생했다. 하지만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국방부를 맡고 있던 21대 노재현 장관은 이를 저지하지 못한 채 피신했으나 발각돼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체포를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4년 12월 취임한 32대 이양호 장관은 첫 공군 출신 국방장관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금강 백두 정찰기 사업과 관련해 로비스트 린다 김과의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지난해 12월 14일 최순실 국정농단 국회 국정조사에 출석한 김장수 당시 주중대사(전 국방장관)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2006년 11월 취임한 40대 김장수 장관은 2007년 10월 평양에서 열렸던 제2차 남북정상회담 때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꼿꼿한 자세로 악수를 나눠 ‘꼿꼿장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국회의원을 거쳐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 올랐으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의 무능한 대처가 논란을 빚자 같은 달 23일 “국가안보실은 자연재해가 났을 때 컨트롤타워는 아니다”라고 밝힌 후 물러났다.

당시 발표는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인 12일 거짓으로 드러났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9월 27일 국가위기관리센터 캐비닛에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불법으로 변경한 자료를 발견했다”며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의 안정적인 보좌를 한다’는 등의 내용으로 2014년 7월말 ‘안보는 국가안보실이, 재난은 안전행정부가 관장한다’고 불법적으로 변경됐다”고 밝혔다. 여기에 세월호 사고 당시 보고일지가 조작됐다는 증거가 드러나 청와대가 13일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면서 김장수 전 실장에 대한 수사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관진 전 국방장관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국군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사건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2010년 12월 취임한 43대 김관진 장관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도발로 인한 군의 혼란을 수습했다. 이명박정부에서 박근혜정부로 집권세력이 교체되는 상황에서도 장관직을 지켰고 세월호 사고 직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직을 맡아 주한미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등 굵직한 안보 이슈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군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공작에 개입한 혐의로 검찰 수사선상에 올랐다.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 오명을 남긴 또 하나의 국방부 장관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문민통제와 책임의식 작동하지 않은 것이 원인

정부조직법과 국군조직법에 따르면, 국방부 장관은 국방에 관련된 군정 및 군령과 그 밖에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며 대통령의 명을 받아 군사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 합동참모의장과 각군 참모총장을 감독한다.

업무 형태로 보면 55만 대군이 유사시 최상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관리하면서 국방부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예비역 단체, 육해공군 본부, 방위사업청, 병무청, 한국국방연구원 등-간의 갈등을 조정, 정책 수행에 차질이 없도록 관리하는 것이 국방부 장관의 주요 책무 중 하나다. 정권 초기에 부임한 장관들에게는 국방개혁의 청사진을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역할이 추가된다.
8월 30일 미국 워싱턴의 6.25 참전기념비에 경례하는 송영무 국방부 장관. 국방부 제공

이처럼 막중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방부 장관이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거나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게 되는 것일까. 국방부 장관은 정무직으로 현역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임명된다.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의 뜻을 군에 적용하고 지휘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원리와 법치(法治)에 기반한 문민통제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민통제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승만정권 시절 형식적으로나마 작동했던 문민통제는 5.16 쿠데타 이후 20여년 동안 군사정권이 집권하면서 무너져버렸다. 국방부 장관은 군을 통제하기보다는 내각에서 군을 대표하는 직책으로 성격이 바뀐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 조직은 군을 통제하지 못했고, 대통령과 군부는 직거래를 통해 정권 기반 확립과 군의 이익 확보를 상호 보장했다. 이같은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의 관계와 유사하다. 일본 군부는 천황의 명령에 따른다는 명분을 내세워 정부의 통제기능을 무력화시켰다. 군부의 독주를 저지할 정치적 영향력이 사라지자 일본 군부는 전쟁을 향해 거침없이 내달렸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패전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같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김영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민간 관료 출신인 이수휴, 정준호씨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됐다. 노무현정부 시절에는 해군 출신 윤광웅 국방부 장관이 문민통제와 국방개혁을 진행했으며, 이명박정부에서는 관료 출신 장수만, 이용걸 차관을 기용하는 한편 군 전력증강 사업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통제를 시도했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원칙에 대한 공감대 확보와 제도 개선 등 근본적 대책 없이 진행된 통제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국방부 차관의 서열이 미국과 일본, 독일에선 군인보다 높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합참의장은 물론, 육해공군 참모총장 같은 대장 직급보다 낮은 상황을 방치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 역풍은 국군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공작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 사령부에서 열리는 국군의 날 행사에 참석해 송영무 국방장관과 열병하고 있다. 평택=남제현 기자

국방부 장관은 군을 관리하는 정무직 고위공무원이다. 높은 수준의 책임의식과 법치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같은 조건을 갖추고 장관직을 수행한 사람을 꼽아보라면 쉽게 떠오르는 인물은 없고, 그 반대의 인물들이 먼저 연상되는 게 현실이다. 군사정권의 폐습이 몰고온 권위주의와 무조건적인 상명하복이 초래한 결과다. 촛불혁명으로 집권한 문재인정부에서 국방부를 맡은 송영무 장관이 국방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대 장관과 차관들의 공과(功過)를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는다면 적어도 욕을 먹는 또 하나의 장관으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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