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원록(源綠)인 그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 그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베이징으로 갔다. 1926년 일시 귀국,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베이징사관학교에 입학,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류돼 3년형을 받고 투옥됐다. 이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
이육사(위 사진)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가 1944년 1월의 새벽에 숨진 중국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 독립기념관 제공 |
1930년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일보에 첫 시 ‘말’을 발표하고, 1937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포도’와 ‘절정’ 등을 김광균·신석초 등과 함께 창간한 동인지 ‘자오선’에 선보인다. 그 후로 한글 탄압이 심해지자 한시만 쓰는 식으로 항일시들을 내놓는다.
1942년엔 마치 광복의 날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사실상의 유고(遺稿)인 ‘광야’를 발표한다. 그리고 해방 1년 전인 1944년 1월의 새벽,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끌려간 중국 베이징의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했다. 그가 숨을 거둔 곳은 베이징시 네이이구 동창후둥 1호(현재는 28호)이다. 왕푸징에 위치한 이곳은 지금은 건물 내에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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