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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18> 경주이씨(慶州李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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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1-09 03:45:42 수정 : 2011-11-09 03:4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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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42만… 전주이씨 다음으로 많아… 합천·진주·원주 등 수많은 이씨 본산
문과급제자 178명… 공신 10여명 배출… 익재 이제현·백사 이항복 등 유명 인물… 성철 스님·이병철 전 회장도 같은 가문
경주이씨는 시조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에서 유래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원전 117년에 알평공이 하늘에서 신라의 영산(靈山) 중의 하나인 경주 서북에 있는 금강산(金剛山)의 표암봉(瓢巖峰)에 내려왔다고 전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유리왕(儒理王) 9년 봄에 6부(部)의 이름을 고쳤는데, 양산부(楊山部)는 급량부(及梁部)(李氏)로, 고허부(高墟部)는 사량부(沙梁部)(崔氏)로, 대수부(大樹部)는 점량부(漸梁部)(孫氏)로, 우진부(于珍部)는 본피부(本彼部)(鄭氏)로, 가리부(加利部)는 한기부(漢祇部)(裵氏)로, 명활부(明活部)는 습비부(習比部)(薛氏)로 했다고 전한다.

이알평의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은 6촌의 하나였고, 알평(謁平)은 6촌의 부족사회를 영도하는 수장이었다. 경주이씨대종보에 따르면, 그는 6부족의 촌장과 협의한 후 박혁거세를 왕위에 세우고, 벼슬은 아찬(阿粲)에 올라 군사업무를 맡아보았다. 그 후 유리왕 9년(기원전 32년), 신라 건국의 공을 인정받아 이씨(李氏)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법흥왕 23년에는 익호를 문선공(文宣公)으로 하였고, 무열왕 3년엔 은열왕(恩烈王)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조 이알평 이후 35대까지 세손이 전해 내려오지 않고, 신라 말에 들어와 소판(蘇判) 벼슬을 한 진골 출신 이거명(36대 李居明)에 이르러 본관성씨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주이씨는 고시조(古始祖)를 이알평으로, 중시조(中始祖)를 이거명으로 삼고 있다.

경주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42만4866명으로, 이씨 중에서는 조선왕조를 개국한 전주이씨(260만9890명)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또한 본관별 성씨 순위에서도 경주김씨 다음으로 많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경주이씨에서 수많은 이씨들이 분관되어 나감으로써 우리나라 이씨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주이씨 시조 이알평의 묘우가 세워진 양강묘.
경주이씨의 연혁과 분파

경주이씨는 시조 이알평에서부터 현재의 희(熙)자 돌림까지 75대를 내려오고 있다. 씨족의 역사도 2000년이 넘는 셈이다. 하지만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소판공 이거명 전까지 35대는 실전되어 전해지고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설명대로 이거명 이전에도 이씨 성을 썼는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진흥왕 이전에 세워진 신라의 비문들을 보면, 이씨(李氏) 성이 쓰여 있기보다는 마을 이름인 급량부와 이름만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급량부 ○○’ 이런 식인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과 고구려의 장수왕, 신라의 진흥왕 때부터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전하고 있는 이알평에 대한 기록이 사실이라고 판단하긴 쉽지 않다. 따라서 경주이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판공 이거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이거명이 중시조가 된 것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묘지(墓誌)를 쓸 때 원대손(遠代孫)인, 신라 때 소판 벼슬을 지낸 이거명 이후의 세계를 적었기 때문이다.

경주이씨에서 외래본관성씨를 제외한 수많은 본관들이 갈라져 나갔다. 이거명 이전에 분관된 성씨로 성주이씨(星州李氏) 등이 있으며, 이거명 이후에 이구(李球)를 시조로 하는 우계이씨(羽溪李氏), 이위(李渭)를 시조로 하는 차성이씨(車城李氏), 이개(李開)를 시조로 하는 합천이씨, 이거명의 6세손인 이주좌(李周佐)를 시조로 하는 아산이씨(牙山李氏), 이주복의 아들 이우칭을 시조로 하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이거명의 15세손인 편(翩)의 아들 이임간(李林幹)을 시조로 하는 장수이씨(長水李氏), 이거명의 18대 이영재(李永梓)와 이군재(李君梓)를 시조로 하는 진주이씨(晉州李氏), 이거명의 19세손 반계(攀桂)를 시조로 하는 원주이씨(原州李氏) 등이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 토종 이씨의 대종인 경주이씨는 소판공 이거명 이후 고려 말기에 들어와 크게 번성한다. 분파도 고려시대에 8개 분파로 나뉘고, 이후에 다시 70여개 파로 나뉘게 된다. 그중 8대파는 성암공파(誠菴公派), 이암공파(怡庵公派), 익재공파(益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국당공파(菊堂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등이 있다. 그 외에도 지손(支孫) 계통으로 판전공파(判典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석탄공파(石灘公派) 등이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말과 조선조에 들어와 크게 세력을 떨쳤다, 문과급제자만 178명이나 나왔으며, 상신 8명,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명의 공신을 배출하였다. 특히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안에서 4명의 영의정과 좌의정 2명, 대제학 2명이 나와 조선의 대표적 명문가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익재 이제현의 집안인 익재공파에서는 이완(李浣) 대장을 비롯하여 좌의정과 대제학 1명씩 나왔고, 이천을 파조로 하는 국당공파에서는 정순공(靖順公) 이성중(李誠中)의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왔다. 

덕수궁 미술관에 보관된 익제 이제현 영정.
경주이씨의 인물들

경주이씨는 고려말 이후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문가문으로 이름이 높다. 경주이씨 가문에서 배출된 인물 중에는 역사적으로도 이름이 높은 인물이 많이 있으며, 특히 백사 이항복의 가문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왔다. 고려에서는 익재 이제현이 유명하며, 조선에서는 백사 이항복이 있으며, 독립운동가로는 이준 열사와 함께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된 이상설(李相卨)과 7형제가 함께 50여명의 가솔을 이끌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형제가 유명하다.

또한 종교계에서는 조계종의 종정을 지낸 성철(性徹) 스님이 있고, 재계에서는 삼성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을 일군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과 이건희(李健熙) 부자가 있으며, 바둑계의 기린아 이창호(李昌鎬)도 경주이씨 가문이다.

익재 이제현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익재 이제현은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인 이금서(李金書)의 후예이다. 아버지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이 신흥관료로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으며, 15세에 문과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충선왕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면서 원나라의 요수(姚遂),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조맹부(趙孟?) 등과 교우하였다. 고려에 돌아온 후 충선왕이 유배를 당하고 입성책동(入省策動·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만들려는 술책)이 일어났다. 이에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서를 올렸다. 후에 입성책동이 저지되었으며, 그의 벼슬도 밀직사를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공민왕 때에는 정승이 되어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총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지식과 견문, 그리고 문장으로 수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하고 국사(國史) 편찬을 맡았으며, 저술로는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 있다.

백사 이항복 영정.
백사 이항복

백사 이항복은 형조판서와 우참찬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권율(權慄) 장군의 사위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하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난을 무난히 수습한 공으로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종하여 의주로 갔으며, 한음 이덕형을 명나라에 급파하여 군대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이조판서를 맡았으나,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맡아 전란을 지휘하였다. 1600년에 영의정이 되었으며, 1602년에는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으며,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에 복관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포천의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의 노덕서원(老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백사집’ ‘북천일록(北遷日錄)’ ‘사례훈몽(四禮訓蒙)’ 등이 있다. 서울 부암동에 이항복의 별장터로 추정되는 곳이 남아있는데, 이 계곡을 ‘백사실계곡’이라고 한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은 이항복의 10대손이다. 그는 서울 남산골(苧洞)에서 판서 이유승(李裕承)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회영을 비롯해 첫째 건영(健榮), 둘째 석영(石榮), 셋째 철영(哲榮)과 아우인 시영(始榮), 호영(頀榮) 등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6명의 형제 50여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석영, 회영, 호영 3형제는 순국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이시영만 임정요인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이회영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 이상설 등과 교우하였으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 후 석영이 양부로부터 물려받은 6000석(石)의 재산으로 토지를 구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후 다롄(大連)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고문에 의해 순국하였다. 그의 동생 이시영은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수립 후 초대 부통령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전횡에 반대하여 공직을 떠났다.

성철 스님

경상남도 산청에서 태어났으며, 속명은 이영주(李英柱)이다. 진주중학교를 졸업하고 출가하여 해인사에서 하동산(河東山) 대종사(大宗師) 밑에서 득도하였다. 속세와 관계를 끊고 오로지 구도에만 몰입했으며, 파계사에서 행한 장좌불와(長坐不臥) 8년은 유명하다.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나, 여전히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구도를 계속하였다. 조계종을 이끌며 지눌(知訥)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비판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하여 불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과 이건희

이병철의 호는 호암(湖巖)이며, 경남 의령에서 이찬우(李纘雨)의 막내로 출생하였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였으나, 병을 얻어 학업을 중단했다. 아버지로부터 300석 토지를 분재 받아 마산에서 정미소사업을 시작했다. 같은 해 히노데자동차회사를 인수했으나, 사업에 실패한 후 부채를 청산하고, 1938년 대구에서 청과류와 어물을 다루는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였고, 1948년 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을 시작했다. 1953년부터는 제일제당 설립, 제일모직 설립을 통해 제조업을 시작하였다.

그 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성균관대학교 등을 인수·경영하였고, 중앙개발·고려병원·한국비료·삼성전자·제일합섬·삼성중공업·동양방송·중앙일보사 등을 창설, 운영하였으며, 삼성문화재단·삼성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하여 사회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또한 전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를 뒤이어 아들 이건희가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킴으로써 명실상부한 한국의 대표 기업을 만들어 냈다.

한국다문화센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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