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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중재 없이 ‘안보청구서’ 내미는 미국 [박수찬의 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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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08-09 16:14:45 수정 : 2019-08-09 21: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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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공군 전략폭격기 B-1B가 훈련을 위해 이륙하고 있다. 미 공군 제공

‘동맹 논리보다 계산기가 우선인 시대.’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한미 관계를 이보다 더 잘 드러내는 표현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로 돕고 지지하며 공존공영을 꾀하는 동맹의 논리는 자취를 감췄다. 손익계산을 한 뒤 ‘청구서’를 내미는 관계가 동맹의 논리를 대체하고 있다. 옆집에 살던 키다리 아저씨가 영업사원으로 돌변해 청구서를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미국은 최근 일본의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로 격화된 한일 갈등에 대해 이렇다 할 관여를 보이지 않고 있다. 대신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탈퇴 이후 거론되고 있는 중거리 탄탄도미사일의 아시아 배치 가능성과 호르무즈 해협 호위 연합체 합류 요청,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을 거론하며 한국의 참여를 요구하는 모양새다. 9일 방한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미국은 다양한 경로로 한국을 압박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9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사일에 호르무즈까지…미국발 ‘청구서 폭탄’

 

이란 핵협정을 파기하면서 촉발된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트럼프 미 행정부는 호위 연합체 구성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참여를 종용하는 분위기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4일(현지시간) 각국의 동참을 촉구하면서 “한국, 일본처럼 이해관계가 있고 물품과 서비스, 에너지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나라들이 자국 경제의 이익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한국을 콕 집어 언급했다. 

 

중국이 강하게 반발하는 중거리 미사일 아시아 배치에 대해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6일(현지시간) “미국은 해외에 주둔 중인 미군과 한국 일본 등 동맹국을 방어해야 한다”며 배치 필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6일(현지시간) “아시아에 있는 어느 누구에게도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해도 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고 설명해 볼턴 보좌관의 발언과 차이를 보였다. 에스퍼 장관의 발언은 중거리 미사일 배치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달래기 위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정경두 국방장관과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이 9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회담에 앞서 의장행사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도 강해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트위터에 “한국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위한 협상이 시작됐다”며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 현저히 더 많은 돈을 내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 주둔에 필요한 비용 외에 핵추진항공모함을 비롯한 전략무기의 한반도 전개 비용까지 추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1조원 수준인 방위비 분담금이 최대 6배까지 치솟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우리 외교부는 “방위비 분담금 협상은 아직 공식 개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9일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한국을 방문,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정경두 국방부 장관 등을 만났으나 이와 관련해 공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다양한 외교경로를 통해 방위비 분담금 증액과 호르무즈 해협 파병 등을 압박할 것으로 보여 향후 정부의 대응이 주목된다.

 

◆호르무즈 파병이 ‘발등의 불’ 가능성

 

미국이 한국에 내미는 ‘안보청구서’ 중에서 가장 심각한 부분은 호르무즈 해협 파병 문제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6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미국으로부터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대해 구두 요청이 있었다”고 밝혔다. 정 실장은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의 원유 수입의 70% 이상이 지나가며, 우리 선박이 연 1200회를 통과하는 지역”이라며 “선박 안전을 위해 파병의 필요성이 있는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독도 영공 침범, 북한 탄도미사일 발사, 한일 갈등 국면 등 주변국의 압박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운 정부의 입장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평가다.

 

이란 혁명수비대 쾌속정들이 걸프만에서 항만 방어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호르무즈 해협에 파견될 부대로는 소말리아 아덴만에서 해적퇴치와 상선보호 임무를 수행하는 해부대 29진 대조영함(4400t급)과 조만간 아덴만으로 출항해 29진과 교대할 30진 강감찬함(4400t급)이 거론된다. 대북 경계태세 유지 등으로 별도의 함정을 파견하기 어려운 만큼 청해부대의 활동영역을 호르무즈 해협으로 변경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청해부대는 우리 국민의 리비아, 가나 피랍사건 등 4차례에 걸쳐 다른 해역으로 이동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정부가 실제로 파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여론의 반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정부 소식통은 “노무현정부와 연을 맺었던 청와대와 여권 인사들은 이라크 파병 당시 정국을 기억하고 있다”며 호르무즈 해협 파병 결정이 쉽지 않을 가능성을 시사했다. 실제로 2003년 노무현정부가 한미 동맹을 위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을 때,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거센 반발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갈등이 심각해졌고 여권의 지지기반도 흔들렸다. 호르무즈 해협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하면 정부에 정치적 부담을 안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민중공동행동과 전쟁반대 평화실현 국민행동이 1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청해부대 호르무즈해협 파병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호위 연합체 합류를 요청받은 국가들의 움직임도 변수다.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은 미국과의 관계 강화를 위해 공식 참여의사를 밝혔다. 반면 독일은 불참할 뜻을 밝혔고, 호주는 결정을 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은 정보제공에 국한한다는 방침이다. 미국의 요청을 받은 국가들의 대응이 서로 달라 호위 연합체가 어떻게 구성될지도 미지수다.

 

우리 해군 함정이 호르무즈 해협으로 출동해도 문제는 여전하다. 위협의 강도가 아덴만보다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아덴만에서 청해부대가 상대했던 해적은 AK 소총과 RPG 로켓으로 무장하고 있어 청해부대가 압도적인 전투력을 갖고 대응할 수 있었다. 반면 호르무즈 해협은 이란 혁명수비대 해군 함정들이 포진하고 있다. 이란 군함들은 유조선 항로와 가까운 이란 영해에 머물면서 언제든 기습작전을 감행할 수 있다. 또 GPS 교란장치를 동원해 호르무즈 해협을 항해하는 상선의 전파 수신을 차단하고, 미군을 사칭해 상선과 교신하는 등 기만행위를 펼치고 있다. 해상 대테러 작전이 아닌, 연평해전 수준의 상황을 고려하고 대비태세를 갖춰야 하는 상황이다. 

 

반면 중거리 미사일의 아시아 배치 문제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 미국은 아시아에 배치할 중거리 미사일을 전력화하지 못한 상태다. 미군이 중거리 미사일 개발을 진행중이지만 최소 5년 안팎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향후 몇 년 동안 물밑에서 논의가 이어질 가능성이 큰 셈이다. 다만 괌을 제외하면 중거리 미사일을 배치할 국가로는 미군이 주둔중인 한국과 일본 외에는 없다는 측면에서 중거리 미사일의 한국 배치는 시간문제라는 관측도 있다.

 

해군 특수부대원들이 대해적작전 훈련 도중 고속단정에서 선박으로 올라가고 있다. 해군 제공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은 향후 한미 협상 과정에서 진통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일본 정상과의 만남을 비롯해 기회가 있을때마다 방위비 증액을 요구했다. 결국 한국은 올해 방위비 분담금으로 전년 대비 8.2% 인상된 1조389억원을 내기로 했다. 여기에 유효기간을 1년으로 줄이는 것도 합의했다. 내년에 또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미국이 대폭 인상을 요구할 경우 한국으로서는 협상이 쉽지 않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되면 한국이 기댈 곳은 미국밖에 없다. 미국의 ‘안보청구서’를 외면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적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미국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국익을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 자국 우선주의가 판치는 상황에서 동맹의 논리를 무조건 적용할 필요성은 낮다. 국익을 기준으로 철저히 검토를 진행한 뒤 유연하게 대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의 향후 움직임에 관심이 쏠리는 대목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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