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내게 먼 곳이다. 한 번도 내 마음속에 거처를 마련해 본 적이 없다. 작가 김곰치씨가 살고, 해운대 쪽 김성종 선생의 추리문학관에 가본 적이 있고, 그리운 옛날 친구가 그곳에서 아이 키우며 번역 일을 하고 있다. 20대 말에는 무슨 짓을 벌이느라 거제도 다닐 때 연안부두 가서 배를 타본 적이 있고, 대마도에 두 번 가느라고 거쳐 본 적이 있다. 더 먼 옛날 대학생 때는 분명 태종대 위태로운 절벽 위에 서 본 적도 있건만, 그래도 부산은 마음의 타향이다.
오전 8시 KTX는 2시간30여분 만에 나를 부산역에 내려놓는다. 몇년 전 고인이 된 작가 이호철의 ‘소시민’을 읽으며 새롭게 정의내린 6·25전쟁 중의 임시수도 부산, 그것은 전후에 새롭게 전개된 한국자본주의의 부화기, 인큐베이터였다는 것. 그러자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김동리의 ‘밀다원 시대’의 주인공 중구에게 부산은 ‘어떤 땅끝’, ‘끝의 끝, 막다른 끝, 그곳에서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한 걸음만 더 내어 디디면 ‘허무의 공간’으로 떨어지고 마는, 그러한 최후의 점 같은 것이었다. 박경리의 ‘파시’는 젊은 날 내가 가장 사랑하던 소설의 하나, 그 비련의 주인공 명화는 부산에 가서 전쟁 중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 소설 속의 여성을 그리워해서 수필집 이름을 명화에게서 한 글자를 빌려 ‘명주’라 짓기도 했다.

부산은 내력 깊은 고장이다.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6·25전쟁 중에 부산은 1023일 동안 임시 ‘서울’이 돼 수도의 기능을 행사했다. 사람들은 살아가야 했다. 1·4후퇴로 본격적으로 밀려든 피란민과 원산철수, 흥남철수, 강릉철수 같은 작전을 통해 뱃길로 내려온 군인, 월남민이 부둣가 하역장에서 막일을 하고, 국제시장에서 물건을 내다 팔고 사고, 시장통에서 일본에 두고 온 아내를 만난 작가 손창섭처럼 잃어버린 식구를 기막힌 우연의 작용으로 해후하기도 했다. 이호철의 ‘소시민’의 주인공인 ‘나’는 원산에서 미군 상륙함정 LST를 타고 내려와 ‘몇달 동안 신세를 지던 부두노동을 모면, 완월동에 있는 한 제면소에 들어가’ 온갖 일을 보고 겪는다. 전쟁의 폭력과 죽음과 폐허 속에서도 부산은 살아 뛰고 있었고, 사람들은 생명의 온기와 활기, 끈질김을 지니고 퇴폐적인 사랑에까지 몰두하고 있었다.
이제 나의 발걸음은 임시수도기념관에서 몇 미터 떨어진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향한다. 서울의 청계천 헌책방 거리는 ‘폭망’한 지 오래이건만 부산은 옛날 그대로 살아 있는 것만 같다. 40개 넘는 헌책방이 비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빼곡히 마주 서 있는 골목에서 나는 헌책이 선사하는 향취와 안도감을 맛본다. 이 보수동 책방 골목은 소개에 따르면 6·25전쟁 중 함경북도에서 피란 온 한 부부가 헌 잡지 등을 팔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1970년에는 70여곳이나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골목을 느리게 걸으며 가게 앞에 진열돼 있는 책을 살펴보니, 임종국이 펴낸 ‘이상전집’(1968)에 장만영이 편집한 ‘바이런 시집’(1969), 김소운 산문집 ‘토분수필’(1977), 함석헌 시집 ‘수평선 너머’(1961), 김광주 번역의 ‘삼국지’(1965) 같은 책이 쉽게 눈에 뜨인다. 이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나는 ‘충남서점’이라는 반가운 간판을 발견하고 주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이 대전 하고도 유성이라는 남명섭씨는 헌책방을 열고 어언 40년이 넘었다는데 1층과 2층에 가득히 들어찬 책은 이분이 쌓아온 세월의 깊이를 실감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글방’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지친 다리를 쉬고 나자 이제 시장 구경을 해야 한다. 부평시장, 깡통시장, 국제시장, 자갈치시장 등 부산은 차라리 시장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 넓은 시장 골목의 연쇄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나는 한국에는 일본과 달리 ‘중심’이 하나밖에 없다고 했던 나의 관념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중심이 아닌 곳이 없지만 부산은 정녕 서울과 다른, 또 하나의 문학적 ‘중심’일 테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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