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한국사의 안뜰] 〈27〉 발해 공주의 초대

입력 : 2016-12-30 19:55:13 수정 : 2016-12-30 19:55:1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시간의 벽 넘어… 공주의 무덤과 함께 발해의 문이 열렸다 죽어도 죽지 않고,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닌 채 검을 꽂고 고통 속에 사는 도깨비와 영원한 안식을 줄 도깨비 신부를 다룬 판타지 드라마가 요즘 인기다. 도깨비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정말 아픔을 딛고 살면서 흉복을 주는 존재인가는 알 수 없지만, 필자에게도 최근 드라마 도깨비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강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무덤은 어느 날에야 다시 빛을 보리오.(河水之畔 斷山之邊 夜臺何曉)”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었다.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그동안 육정산 고분군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자료를 통해서만 묘비와 전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연구를 진행했었다. 올해 4월,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일반에 개방되며 정혜공주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변려체 해서로 쓴 정혜공주 묘비에는 총 21행 72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비는 파손정도가 심해 그중 234자는 무슨 글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1980년 중국 지린성 용두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 묘비에 기록된 총 18행 728자로 인해 비로소 그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공주는 20살의 나이차에도 그 삶의 행로가 너무도 닮아 있었다. 

1949년, 중국 지린성 육정산에서 발굴된 발해 3대 문왕의 둘째 딸 정혜공주의 묘. 발굴 당시 뜨거운 관심을 모았으나 묘역과 유물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고, 올해 4월에야 개방돼 정혜공주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남편과 어린 자식 먼저 보낸 불행한 삶


그녀들은 어려서부터 예쁘고, 총명하며 지혜로움이 남달랐다. 또한 견문이 넓고 안목이 높아 궁중 많은 이들의 찬사가 잇따랐다. 신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두 공주는 훌륭한 가르침을 받으면서 성장하여 배필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이 행복했던 시간을 묘비에는 “원앙새처럼 짝을 이루고, 봉황새처럼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두 공주 모두 젊은 시절 남편을 갑작스럽게 여의었다. 불행은 이후 잇달아 두 공주 모두 어린 아들, 딸을 앞세워 보냈다. 기록에는 “온 세상이 캄캄했다. 그 어디를 돌아봐도 그리운 님, 사랑하는 자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없이 눈물을 흘렸고 햇빛은 잿빛이 된 듯 온 세상에 슬픔이 가득했다”고 한다.

“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달라, 두 새가 홀연 등을 돌리고, 두 칼은 끝내 외롭게 되어버렸다.(所天早化 幽明殊途 雙鸞忽背 兩劍永孤) 어린 아들이 일찍 죽으매 젊은이에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子又夭 未經諸郞之日) 어린 딸이 요절하매 방추를 가지고 놀던 때도 이르지 못하였구나.(稚女又夭 未逢弄瓦之日)”

괴롭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정혜공주는 777년, 마흔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정효공주도 언니의 길을 따랐다. 지아비를 여의고, 사랑하는 딸을 여읜 슬픔을 안고 끝내 37살이라는 꽃다운 나이로 아버지 문왕보다 먼저 세상을 등졌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왕도를 일으키셨으며, (중략) 해와 달처럼 온 천하를 비추었으며, 기강을 세워 어진 정치가 온 세상에 가득하였네. 이에 그 업적은 중화에 짝할 만하고 하우와 비슷하며, 상탕왕의 도야에 주문왕의 국량을 갖추었도다.(惟祖惟父 王化所興 … 若乃乘時御辨 明齊日月之照臨 立極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肖夏禹 陶殷湯而韜周文)”

위대한 조상들이 천하를 통일하고 반석에 올려놓은 나라를 이어받은 아버지 황상 문왕은 덕을 베풀어 3황 5제, 주나라 성왕, 강왕에 견주어질 만큼 칭송을 받았다. 그 왕이 고목처럼 쓰러져 목놓아 통곡했다. 손자손녀를 앞세웠고 또다시 그 사랑하는 두 딸을 떠나보낸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조회도 열지 못했고, 나랏일도 손에 잡히지 않아 놓아버렸다. 공주들과 함께 나누고 즐겼던 화려하고 아름다운 놀이와 음악도 그만두었다. 지친 몸, 애간장이 끊어지는 슬픔에서도 이별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손수 챙겼다. 그리고 상여소리에 실어 두 공주를 떠나보내며 가슴에 묻었다. 행여 추울세라, 행여 외로울세라 소나무, 가래나무를 벗삼아 주었다. 그리고 염원했다.

정혜공주 묘에서 출토된 석사자와 동경 등의 유물은 찬란했던 발해 문화의 면모를 보여준다.
◆고구려 계승 자처한 황제국


발해사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정혜공주와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묘지비의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정혜공주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인 반면에 정효공주 무덤은 벽돌무덤이었다. 정혜공주 무덤에서는 묘비 이외에 석사자등이 발견되었고, 정효공주 무덤에서는 발해 시기 생활모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12폭 벽화 등이 발견되었다. 이는 매장자가 발해 공주의 신분이었음은 물론 발해 왕실 귀족들의 성격이 확인되면서 발해사 전 분야의 자료 부족, 결핍의 갈증을 풀 수 있었다. 두 공주의 묘지명에서는 아버지 제3대 문왕이 57년간 재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국운을 영원토록 하여 3황 5제와 견줄 만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발해가 어떠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재위기간 대흥(大興), 보력(寶曆)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효감(孝感)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하여 나라를 다스렸으며, 금륜성법대왕(金輪聖法大王), 즉 전륜성왕으로서 온 사방에 덕을 베풀었다고 하였다.

성인(聖人), 황상(皇上)으로 불리며 황제국가로서의 위상을 갖추었고 동궁, 공주, 능 등 외명부제나 동궁제, 능묘제 등을 실시한 흔적들도 기록하였다. 또한 정혜공주는 사망해서 장지에 묻힐 때까지 고구려 3년상의 전통에 따라 장례를 치렀고 무덤은 고구려 전통의 굴식돌방무덤에 모줄임천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기록과 유물은 발해를 세운 자신들은 고구려 유민이고, 이 나라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점을 웅변하였다. 

초문과 구름무늬 등이 장식된 정혜공주 묘비. 21행 725자의 비문은 정혜공주의 삶을 전한다.
◆발해를 오롯이 전하는 육정산 고분군


그런데 그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하였던 육정산 고분군, 바로 정혜공주가 잠들어 있는 곳이 개방된다는 소식을 접한 필자는 그동안 가슴 졸이며 다가가 굳게 잠겨 있던 쇠난간 사이로 카메라를 집어넣어 사진을 찍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드디어 만나 볼 수 있을까. 조금씩 묘역에 접근하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에 심장이 요동질을 쳤다. 묘역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사진을 찍고 그동안 궁금했던 여러 사실들을 확인했다. 게다가 관람자들의 편의를 위해 일부는 내부시설을 확인할 수 있도록 유리관으로 만들어 놓았고, 안으로 들어가 형태를 직접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다.

도깨비처럼 행운도 이어졌다. 그동안 한번도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었던 석사자와 묘지비 그리고 여러 유물들이 필자가 길림성 박물관을 방문한 날 눈앞에 전시되고 있었다. 주둥이를 크게 벌려 송곳니를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이 앉아 있던 정혜공주 묘 출토 석사자, 반듯하고 아름다운 해서체로 왕국과 왕비의 생을 기록한 758자의 묘지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또한 정효공주 묘역이 위치한 용두산 고분군에서 출토된 팔각형의 뚜껑 가운데에 은상감한 용, 봉황, 역사상을 번갈아 수놓고 당초문과 구름무늬로 이은 은상감칠합, 두꺼비 형태의 손잡이를 둘러싸고 공작, 신수, 신조, 석사자 같은 동물을 배치하고 인동문, 새를 장식한 도금한 동경 등도 전시되고 있었다. 발해문화, 발해예술의 아름다움이 오롯이 전해졌다.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그동안 판독문으로만 알려진 묘지비를 실제로 보니 가슴이 한없이 뛰었다. 과연 판독문처럼 기록되어 있는지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확인하면서 탄식을 쏟아내었다. 뒤를 돌아보니 두 눈 부릅뜬 석사자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다.

또 그 주변에는 발해유적 곳곳에서 나온 각양각색의 유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필자는 공주들의 손때 묻은 집안을 물건들을 살피면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 속에 담긴 온갖 사연을 회상하고 나누듯이 한참이나 자리에 머물렀다. 자신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슬픔 뒤 간절함인 듯,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그들은 어느 샌가 필자 앞에 다가와 있었다.

김진광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