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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아버지 사도세자 업적·명예 회복… 조선 무예 기틀도 세워

입력 : 2016-12-10 10:00:00 수정 : 2016-12-09 2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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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정조는 왜 ‘무예도보통지’를 펴냈을까? 흔히 정치를 놓고 피도 눈물도 없을 만큼 비정하다고 말한다. 정조는 이미 11살의 어린 나이에 비정한 정치판을 알아버렸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할아버지 영조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데도 어느 누구도 구명 활동을 하지 않았던 상황은 본인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실이었다. 그런 정조가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했을 때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조는 고독한 슬픔이 몰려온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지 13년째 되던 해에 ‘무예도보통지’라는 무예서를 펴냈다. 정조는 왜 이 시점에 뜬금없이 무예서를 펴냈을까?

총도(總圖)는 각 자세들을 하나로 이어 그린 간결한 요약본이다. 왼쪽 그림은 ‘곤봉총도’.‘무예도보통지’의 독보적인 특징은 그림을 활용한 편집이다. 글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게 그림만 492개가 들어있다. 말 위에서 칼을 다루는 모습을 그린 ‘마상쌍도’(오른쪽 그림).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이 말은 정조가 즉위한 첫날 즉위식을 마친 뒤에 대신들을 만나 처음 한 말이었다. 10일 뒤에는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왕이 되자마자 아버지를 위해 한 일은 여기까지였다. 그 뒤 정조는 무려 13년 동안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기다렸다. 국왕이라 해서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았기에 오로지 때를 기다려야 했다.

1789년 8월, 정조는 사도세자 묘소를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영우원을 열었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초를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얼마나 몸부림치고 울었던지 나중에는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곡소리도 나오지 않았으며 구토 증세까지 겹쳤다. 정조는 이날을 위해 거사를 준비하듯 그간 차근차근 준비해왔다. 외척의 위협 속에서 국왕 호위 부대로 출범시킨 장용위(1785년 창설)를 한 해 전인 1788년에 중앙 군영인 장용영으로 승격시켰다. 중앙군 최고 군영인 훈련도감이 버젓이 있었지만 군사적으로 본인의 안위와 정책을 뒷받침할 장용영을 띄운 것이다.

아버지 묘소를 이장해 현륭원을 조성한 그해 가을에 정조는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실 정조는 이미 봄부터 이 책의 편찬을 준비해왔으며 그 와중에 아버지 묘소의 이장도 단행했던 것이다. 정조는 이 책의 편찬 사무국을 장용영에 두었으며 간행도 장용영에서 했다. 그만큼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의 관심 속에서 이듬해인 1790년에 간행을 마쳤다. 무예도보통지라는 책이름도 정조가 직접 지었다.

◆아버지 유업을 계승하다

무예도보통지가 현륭원을 조성한 해에 착수되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정조는 이 무예서가 사도세자의 유업을 계승한 책이라는 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사도세자는 1749년부터 뒤주에 갇혀죽은 1762년까지 영조를 대신해 10년 넘게 대리청정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사도세자는 한교가 무예 6기를 정리한 ‘무예제보’(1598년)에 12가지 무예를 더해 18가지 무예를 담은 ‘무예신보’를 펴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묻혀버렸다. 정조는 사도세자가 결코 나약하거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효종의 북벌 정책을 이어받아 원대한 꿈을 이루고자 한 왕세자임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버지의 씩씩한 기상이 담긴 무예신보를 되살려야 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묘역을 새로 조성하면서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서지만 거기에는 아버지의 명예와 포부를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으려는 정조의 효심과 야심이 담긴 병서라 할 수 있다. 

서울에 있던 장용영 본영의 건물 배치도.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부대로 ‘무예도보통지’ 간행도 담당했다.
◆군문의 무예를 통일하라

정조는 ‘통(統)’이라는 글자를 좋아했다. 통합해서 큰 줄기를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 ‘통’은 정조의 정치 이념이자 국정 철학이었다. 1785년에 정조는 ‘대전통편’과 ‘병학통’을 간행했다. 두 책 이름에 모두 ‘통’자가 들어간다. 대전통편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통합한 법전이며, 병학통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서울 소재 핵심 군영의 군사 훈련과 진법을 통일해 정리한 병서였다. 그리고 1789년에 ‘통’자가 들어간 무예도보통지 하나를 더 추가했다. 병학통은 1785년에 간행했으나 즉위하자마자 국방에 만전을 기하고자 기획한 병서였다. 군영마다 실시하는 군사 조련이 저마다 다르다보니 결과적으로 훈련 수준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이다. 무예도 마찬가지였다. 임진왜란기에 ‘어왜전법’의 일환으로 명(明)으로부터 입수한 근접 무기술이 통일된 형식으로 전수되지 않다 보니 군사훈련의 효율성이 떨어졌고 군사력도 담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 무예의 본보기를 마련하고 이를 보급할 수 있는 토대로서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총4책으로 무예신보에다 여섯 가지의 마상 무예를 더해 24기 무예로 완성됐다. 한·중·일 삼국의 무기술과 무기를 한 데 모은 기념비적인 병서로서 찌르고 베고 치는 근접 무기의 훈련서로 만들어졌다. 먼저 찌르는 창 종류인 장창·죽장창·기창(旗槍)·당파·기창(騎槍)·낭선 6기를 실었다. 다음으로 베는 도검 종류인 쌍수도·예도·왜검·교전·제독검·본국검·쌍검·마상쌍검·월도·마상월도·협도·등패 12기를 실었고, 이어서 치는 권법 종류인 권법·곤봉·편곤·마상편곤 4기와 격구·마상재 2기를 실었다.

이 무예서의 독보적인 특징은 그림을 활용한 편집이다. 글을 몰라도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게 그림만 492개가 들어있다. 또 처음 동작부터 마지막 동작까지 자세 이름을 종합한 총보(總譜), 각 자세들을 하나로 이어 그린 총도(總圖)는 간결한 요약본으로서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이 새로운 편집 방식은 실용과 실사구시의 실현이 무엇인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 사회의 비주류들이 주도하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가 전통적인 인재 등용의 방식을 깬 도전 정신이 빚어낸 작품이다. 그래서 더 놀랍다. 정조가 이 책을 펴내기 위해 선택한 사람들은 높은 관료도 아니요, 그렇다고 좋은 집안 출신도 아니었다. 이 책에 참여한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는 모두 서얼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비주류들이었다. 하지만 실력은 당대 최고였으며 새로운 조선 사회를 꿈꾸는 진보적 학자들이자 무사였다. 이덕무와 박제가는 ‘백탑시파’를 주도한 북학파로서 규장각 외각의 초대 검서관이었다. 검서관은 서얼의 불만을 해소하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기 위해 정조가 마련한 관직으로 양반가 서얼 중 학식과 재능이 탁월한 사람을 선발했다. 두 사람은 가정 형편이 몹시 어려웠으며 가진 것이라곤 재능뿐이었다. 두 사람은 규장각에 오래 근무하면서 여기에 비장된 서적을 마음껏 탐독했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절친한 벗이자 처남이었다. 29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오랜 기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46세인 1788년에 추천으로 장용영 초관(종9품)에 임명되었다. 장용영의 말단직으로 시작했으나 1년도 되기 전에 정조에게 발탁되어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참여했다. 출중한 권법과 창검술 덕분이었다.

세 사람의 역할도 흥미롭다. 이덕무와 박제가가 책의 내용과 편집을 맡았다면 백동수는 무예에 능숙한 장용영 장교들과 함께 직접 무예를 실연했다. 곧 이론과 실기를 배합해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한 시대의 획을 긋는 병서가 나올 수 있었다. 여기에는 이들의 재능만을 보고 발탁한 정조의 혜안과 실험 정신 그리고 실학이라는 학문적 분위기가 뒷받침되었음은 물론이다.

◆실용, 부국강병으로 가는 길

무예도보통지는 철저한 고증과 연구를 거쳐 탄생한 무예서다. 사라지거나 잊혀진 조선의 무예를 찾아 문헌들을 뒤지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고증하고 재현해냈다. 또 각 군영에서 전수되는 무예 기법을 조사해 차이점을 밝혀내고 어떻게 표준 무예를 만들지 고민했다. 무예만이 아니라 무기도 제대로 된 표준 무기를 제시하기 위해 실물을 찾아다녔다. 이 책에 인용된 서책만 148여종이나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무예도보통지는 오늘날 조선 무예서의 결정판이자 동아시아 삼국 무기술의 집약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책에 참여한 이덕무는 무예도보통지를 병서로만 끝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미루어 조정은 실용의 정치를 하고, 백성은 실용적인 생업을 지키며, 문인, 학자는 실용적인 책을 짓고, 군사들은 실용적인 기예를 익히며 상인들은 실용적인 상품을 유통한다면 부국강병의 나라가 될 수 있으며 민생을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다봤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무예도보통지에 면면히 흐르는 실용의 정신을 사회 전반에 퍼트리자는 당부로서 현재 우리 현실에도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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