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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3〉우뉘산 돌단검과 군장들의 지혜

입력 : 2016-12-02 21:42:44 수정 : 2016-12-02 21: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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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시대 문화층 품은 신성한 산… 선조들 갈등해결 지혜 엿보여
중국에 있는 우뉘산성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이 도읍을 정하고 왕성을 쌓았던 곳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비류 골짜기에 있는 홀본 서쪽 산 위에 쌓으시고 도읍을 세우셨다”고 기록돼 있다.
◆황제가 나올 길지(吉地), 우뉘산


1890년대 펑톈푸(奉天府·지금의 선양시)의 도교 사원 태청궁의 관리자였던 리신셴(李信仙)은 어느 날 평소 가까이 지내는 펑톈의 관원으로부터 화이런현(懷仁縣·현재의 환런만족자치현) 통자강(?家江·지금의 훈강) 가에 주변 수십 리의 뭇 산을 통솔하듯 우뚝 솟은 큰 산이 있는데 신령스럽기 그지없다는 말을 듣는다. 리신셴은 과연 어떠한 곳이기에 관원이 이러한 말을 하나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펑톈푸에서 출발한 지 며칠 만에 화이런현 관내로 들어서게 되었는데, 현청에 도착하기 수십 리 전에 산 정상부에 마치 탁자를 세워놓은 듯 수직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 신령스러운 산을 보게 된 리신셴은 바로 그 산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리신셴은 무언가 알지 못할 힘에 이끌리듯 곧바로 우뉘산(五女山) 정상에 올랐다. 산 위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니 통자강이 우뉘산 자락을 에스자형으로 크게 휘감아 돌면서 화이런현 남쪽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태극 팔괘의 형상처럼 보였다. 게다가 굽이쳐 흐르는 통자강은 마치 여의주를 문 한 마리 용 같았다. 몹시 흥분한 리신셴은 펑톈푸로 돌아와 관원과 지역 유지들에게 화이런현이 팔괘 형상의 땅으로 황제가 나올 길지이고, 우뉘산은 옥황상제의 명이 내려오는 성산이라고 설득하여 자금을 얻은 뒤 우뉘산 정상에 도교 사원을 지었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대혁명 때 파괴되었다가 최근 다시 지어진 우뉘산의 옥황관이다.

◆“서쪽 산 위에 도읍을 세우셨다.”

이때로부터 1500여년 전의 어느 날, 고구려의 스무 번째 왕 장수왕은 아버지왕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며 선돌 모양의 거대한 돌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새겨놓는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인데, 비문의 첫머리에 고구려를 개국한 추모왕의 개국 내력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께옵서 나라를 세우셨다. 추모왕께서는 북부여 출신이신데, 천제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며 알을 깨고 세상에 나셨다. 태어나시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으셨다. (중간 글자 판독 불능) 수레를 타고 남쪽으로 순시하셨는데 가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에 이르셨다. 왕께서 나루에 도착하자 “나는 황천의 아들이자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엮고 거북이를 떠오르게 하라”고 말씀하시니, 말씀에 응답하여 갈대가 엮여지고 거북이가 떠올라 강을 건너시게 되었다. 비류(沸流) 골짜기에 있는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쌓으시고 도읍을 세우셨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는 비류수는 지금의 훈강이다. 또 홀본은 졸본(卒本)이라고도 표기되는데, 지금의 환런만족자치현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겨져 있는 추모왕이 왕성을 쌓았다고 하는 홀본 서쪽의 산은 고구려산성이 있는 훈강 가에 우뚝 솟아 있는 우뉘산임이 분명하다.

◆5개 문화층이 공존하는 우뉘산 문화층

우뉘산의 고구려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905년 일본인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학술 조사를 했다. 1944년에는 일본인 고고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가 환런만족자치현과 지안현(集安縣)의 고구려 유적을 조사하면서 우뉘산성을 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뉘산성이 전면적으로 조사된 것은 1996∼1998년, 2003년의 대규모 발굴 때였다. 중국에서 우뉘산성을 199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한 뒤 우뉘산의 고구려 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던 것이다. 중국은 이때의 발굴 조사를 기초로 2004년에 우뉘산성을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등재하게 된다.

우뉘산성에서는 전체 다섯 개 시대의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가장 아래쪽에 퇴적되어 있는 1기문화층은 신석기시대문화층, 그 위의 2기문화층은 청동기시대 말기∼초기 철기시대 문화층, 그 위의 3기문화층은 고구려초기문화층, 그 위의 4기문화층은 고구려중기문화층, 그 위의 5기문화층은 금나라문화층이다. 1990년대 랴오닝성문물고고연구소가 주관한 발굴 조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것은 고구려시대의 유적이다. 우뉘산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고구려 유적 못지않게 중요한 유적이 바로 청동기시대 말기∼초기 철기시대문화층이 아닐까 한다.

우뉘산성에서 출토된 돌단검. 군장사회에서 긴장과 갈등을 풀기 위해 노력했던 회합과 소통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우뉘산성의 돌단검


우뉘산성 2기문화층은 서문지 동측의 평탄지와 4기문화층의 1호 대형 건물지로부터 서남쪽으로 90m가량 떨어져 있는 완사면지에 퇴적되어 있다. 다시 말해 2기문화층의 퇴적 범위는 동서 130m, 남북 70m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이 범위 내에서 네 동의 집자리와 문화층이 조사되었다. 그런데 우뉘산성 2기문화층의 집자리와 문화층에서는 토기 외에 청동기시대 말기∼초기 철기시대 훈강 유역 등에서 널리 사용된 청동칼을 그대로 본떠 아주 정성들여 정밀하게 만든 돌단검 조각 7점이나 출토되었다. 중국 동북 지역 전체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 이와 같은 돌단검은 우뉘산성 2기문화층의 것이 유일하다.

우뉘산성 2기문화층의 돌단검이 출토된 네 동의 집자리는 험준한 산, 그것도 깎아지른 듯한 수직 절벽이 솟아 있는 산 꼭대기에 지어져 있다. 청동기시대는 물론 초기 철기시대의 마을은 일반적으로 낮은 구릉이나 강 가의 평탄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이런 곳에 터를 잡아야 일상 생활과 경제 행위에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2기문화층의 집자리는 우뉘산 정상부의 다른 넓직한 곳을 제쳐 두고 굳이 우뉘산성 서문지 가까운 곳에 지어져 있다. 서문지는 우뉘산성을 올라갈 때 우뉘산성 아래의 매표소에서 출발하여 ‘일선천’(一線天)이라 별칭하는 좁은 절벽 사잇길을 힘겹게 올라간 뒤 우뉘산성 안으로 첫발을 디디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더욱 기이한 것은 우뉘산성 돌단검의 재질이 청색 혈암이라는 점이다. 우뉘산과 그 주변은 중생대 백두산의 화산 활동으로 암석층이 유문암, 안산암, 화산쇄설암, 현무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뉘산에서 제일 가까운 환런만족자치현의 혈암 산지로는 52㎞와 60㎞가량 떨어져 있는 무위쯔진(木盂子鎭)의 놘허쯔(暖河子)와 셴런둥(仙人洞)이 있다.

오강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돌단검이 증언하는 소통의 지혜


환런만족자치현 일대의 청동기시대는 말이 청동기시대이지 실제로는 청동기가 거의 사용되지 못하였다. 이 일대의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간석기가 도구 생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죽어서는 무덤으로 돌널무덤을 사용하였다. 이때에는 지도력이 있는 경험 많고 존경받는 부족장이 부족을 통솔하던 석기 중심의 부족사회였다. 그러다가 기원전 4∼3세기, 우뉘산성 2기문화층의 시대에 이르면 환런만족자치현 일대의 물질문화와 사회가 획기적으로 변동된다. 이때에는 환런만족자치현 일대의 사람들이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을 익혀 직접 청동칼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집단이나 문화와도 적극적인 교역을 진행하였다.

이와 같은 기술적 혁신과 이를 통해 유발된 사회 구조 재편을 통해 환런만족자치현 일대에는 기존의 수많았던 부족들이 몇 개의 유력한 군장사회 집단으로 재편되기에 이른다. 이때의 군장사회들은 서로 비슷한 힘을 갖고 있었기에 긴장과 갈등이 폭력적인 방향으로 치닫게 될 경우 공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환런만족자치현의 군장들이 주목한 것이 바로 오랜 옛적부터 자신들의 조상들이 성산으로 신앙하던 우뉘산이었고, 그 결과 우뉘산성 서문지 안쪽에 이들 군장사회 공동의 의례와 회합 장소가 마련되어 때마다 회합하여 서로 간에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뉘산의 아주 특별한 돌단검은 이러한 과정에 남겨지게 된 것이리라.

‘삼국사기’에 동명성왕(추모왕)이 나라를 세운 뒤 먼저 나라를 세운 비류국왕 송양과 활쏘기로 자웅을 겨루어 극한의 갈등을 해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는 함축적인 설화이지만, 우뉘산성의 돌단검에 투영되어 있는 앞선 시대의 현명한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갈등이 많은 시대, 우뉘산성의 돌단검이 주는 교훈을 되새겨보게 된다.

오강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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