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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2〉 뭇별이 에워싼 북극성, 경복궁의 권위

입력 : 2016-11-25 21:25:58 수정 : 2016-11-25 21: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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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국가의 이상 담은 왕성구조… 왕실 존엄·권위 강조 ◆서울 건설의 중심, 궁궐과 종묘

서울의 4대궁과 종묘 관람객 수가 올해 1000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1000만명이라니 어마어마한 숫자다. 우리 국민들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으니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유산이라 할 만하다. 창덕궁, 종묘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도 되어 있으니 이렇게 자부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소중히 여겨서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의 심장 한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는 궁궐과 종묘는 건립 당시부터 조선 국왕에 비견할 만한 위상을 가진 건물이다. 태조 이성계가 임금에 오르면서 반포한 즉위교서가 증거다.

“천자는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는 오묘(五廟)를 세우며, 왼쪽에는 종묘를 세우고, 오른쪽에는 사직을 세우는 것이 옛날의 제도이다.”

이 글은 즉위교서의 첫 번째 강령으로 예제(禮制) 건축의 기준에 따른 수도 한성 건설계획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조선 건국 주체세력들이 꿈꾸었던 이상사회의 모습이 함축되어 있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하고 예를 국가의 운영수단으로 삼아 예에 의해 다스려지는 ‘예치국가’(禮治國家)를 건설하겠다는 원대한 국가목표를 천명한 것이다.

한양 조성원리를 상징하는 경복궁의 근정전.
◆국왕의 권위를 표현한 이상적 형태인 왕성 구조


조선 건국세력은 수도 한양에 정궁인 경복궁을 중앙에 두고서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을 건립했다. 종묘는 국왕 조상의 신주를 모셔놓은 사당으로서 종법사회의 수직적 위계질서의 표상이다. 사직은 천하 사람들의 생존을 좌우하는 지기(地祇·땅귀신), 곡신(穀神·곡식신)을 모신 제단이니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경제적, 물적 토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존망과 왕권의 성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현실성을 가진 터라 종묘와 사직의 준말인 ‘종사’(宗社)는 국가와 대칭으로 인식되었으며 국왕은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종사는 조선의 왕권체제의 기틀을 확고하게 지탱해 주는 새로운 권력구조의 상징이었다. 정궁의 좌우에서 국왕을 떠받쳐 주는 두 기둥 종묘와 사직이 표방하는 외형상의 위의(威儀)는 국왕의 권위,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동시에 이를 과시하는 상징물을 현실에서 구현한 정치적 이상형태가 왕성 구조라 하겠다.

국왕의 지위는 또 하나의 강령으로 강력한 토대를 구축했다. 네 번째 강령인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실시이다. 네 가지 예는 즉위교서에서 나라의 큰 법이라 표현했다. 국왕의 지위를 일상생활에서조차 강력하게 지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실천적인 예법으로 관혼상제를 채택한 것이다. 관혼상제를 통해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겠다고 하였으니 국가와 사회의 기본질서, 안녕 도모에 가장 보편적인 관습체계로 인식됐다. 

조선의 한양조성 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수선전도’. 한양의 중심은 경복궁이었고, 좌우로 종묘와 사직을 두어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동시에 조선이 추구하는 사회질서를 상징화했다.
◆“뭇별에 둘러싸인 북극성”


즉위교서를 기초한 이는 삼봉 정도전이다. 그는 “관혼상제가 풍속을 한결같이 하는 바, 이 모두 정사(政事)로 베풀어서 그 질서를 얻는다”고 했다. 이런 언급을 보면 관혼상제의 시행은 국가 주도의 정치행위라 할 수 있다. 공자가 “위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은 예보다 좋은 것이 없다”고 하였듯이, 관혼상제는 유교사회가 고안한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었다. ‘주자가례’는 이런 지향을 담은 정치서다.

정도전이 즉위교서에서 공표한 그의 국가개혁 구상은 생활개혁을 바탕으로 예치사회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생활개혁은 관혼상제의 실시라는 가례 실천운동으로 나타났다. 기존의 반유교적이고 비윤리적인 관습과 정서를 떨치고 신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 혁신운동이었던 것이다.

예치사회 건설의 구상은 궁궐의 구조에도 적용됐다. 경복궁 앞의 육조거리에 대한 경관을 읊은 정도전의 시를 보자.

열지은 관청은 우뚝하게 서로 마주서 있어(列署苕?相向)
뭇별이 북극성을 에워싼 듯하네(有如星拱北辰)
달밝은 새벽 관가의 길거리는 물 흐르듯 하고 (月曉官街如水)
명가는 조금의 먼지도 일지 않네(鳴珂不動纖塵)

궁궐은 광화문 앞에 늘어서 있는 정부 중앙기관과 귀가고택에 에워싸인 듯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정도전은 이것을 마치 뭇별이 북극성을 끼고 도는 듯하다고 표현했다. 권근도 ‘성환열서분(星環列署分)’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북극성은 물론 국왕 혹은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상징했다.

사직단 대문.
실제 경복궁은 한양의 주산인 백악산을 등지고 북쪽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런데도 경복궁을 북극성으로 상징화한 것은 중앙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방위로서 국왕의 존엄함을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중앙에 대한 강렬한 인식은 수도 한양을 국토의 중앙에다 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왕성을 국토의 중앙에 자리 잡게 한 것은 사방에서 세금을 내기 편리하고 통제에 편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념적으로 중앙은 방위 가운데 가장 높아서, 최고 통치권자의 존엄과 권위의 상징으로 간주됐다. 정도전은 “궁원이란 조정을 높이고 명분을 바루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궁궐 건축에 있어서 조정을 높이고 명분을 바르게 할 수 있는 신분적 위계질서를 구조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대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견해는 의식과 제도로 상하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이를 ‘예’ 중에 가장 큰 것이라고 한 그는 천자와 제후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등급을 두는 것은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을 통일시키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한양의 성곽건설에 있어 전체적인 성곽구조로부터 건축물의 세부구조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 곧 의제였다. 이런 건축원리는 군신 간의 존비와 귀천을 차등적으로 구분하여 국왕의 최고의 권위를 밝혀주는 예제질서 실현의 방법이었다. 

종묘.
◆궁궐의 오류, 뒤틀린 사회질서


궁궐 지붕 추녀마루에 세워진 잡상은 ‘서유기’의 인물들과 서수(瑞獸), 잡신으로 구성되어 벽사의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잡상은 건물의 지위에 따라 개수에 차이가 있었다. 경복궁 근정전은 ‘조선고적도보’를 잡상이 무너지거나 깨져 있어 숫자가 불분명하지만 다른 자료를 보면 추녀마루 잡상은 1층이 9개, 2층이 10개다. 9는 왕이 전용한 대표수로서, 법궁의 정전이므로 가장 큰 수를 취하였다.

창덕궁의 인정전 또한 9개인 것으로 보아 법궁의 규모에 준하였으며, 이렇게 9개씩을 배치하는 원칙은 경희궁 숭정전과 창경궁 명정전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래의 지위의 건물들은 7개, 5개, 3개로 2개씩 차감했다. 근정전 앞의 근정문의 잡상이 7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래는 이랬던 것인데 지금의 근정전에는 잡상이 7개이다. 근정전과 근정문의 존비와 위계가 같다는 것일까. 인정전 앞의 인정문의 잡상은 5개다. 7개가 아닌 5개로 주저앉혀서 정전의 권위를 깎아 버린 셈이다. 인정문 잡상의 수가 무엇이 옳은 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예제상으로 맞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1000만명이 찾는 궁궐, 종묘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대표 문화재다. 그것의 속살에 오류와 왜곡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궁궐 조성 원리로 따지고 들면 단순히 건축 형식의 잘못이라만 할 수 없다. 당시에 추구했던 국가와 사회의 안정된 질서유지에 꼭 필요한 조건을 상징했던 만큼 조선이 지향했던 천하의 질서가 어그러뜨린 결과인 것이다. 조선은 군신 간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면 천하가 어지럽다고 생각했다. 지금 궁궐 건축의 잘못을 바로잡아 궁궐과 국왕의 자리를 바로잡아야 궁궐의 진정성도 회복될 것이다.

임민혁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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