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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15〉 삼강행실도 ‘조선의 효’를 말하다

입력 : 2016-10-07 20:51:55 수정 : 2016-10-07 20:5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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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에 원수 갚고 손가락 잘라 약으로… 자식된 도리 일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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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일 때, 부모가 되었을 때 한결같은 마음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처지와 상관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은 자식이자 동시에 부모로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화두다. 항상 부모이고 항상 자식이기만 하겠는가마는 그래도 시공의 차이가 무색하게 각자 입장에 따라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 자식의 관계가 자신의 본마음과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내 자식에게 잘하는 것이 내세울 자랑이 아니듯 내 부모에게 잘하는 것이 무슨 상받고 칭찬받을 일이겠는가. 그런데 지난 기록들을 들춰보면 그러한 당연한 일을 하였다고 국가는 유공자급으로 대우했다. 그리고 그 대우란 지금보다도 훨씬 극진했다.

세종대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효의 의미를 백성들에게 전하기 위해 편찬된 삼강행실도 표지.
한문으로 적힌 기록물이 대부분이던 조선시대에 한문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한글로 풀어서 쓰고, 누구나 보면 알 수 있도록 당대의 화가가 그림을 그렸으며, 시(詩)와 찬(贊)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록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다. 가장 많이 유통되고 읽혔던 삼강행실도 언해본(1490·성종21)의 ‘효자도’를 살펴보면 중국 사람이 대부분이고 우리나라 인물은 고려 1명과 조선 3명으로 4명뿐이다. ‘속 삼강행실도’(1514·중종9)에는 33명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9·광해군9)에는 705명의 효자가 등장한다.

삼강행실도에 수록된 우리나라 효자는 세종 이전의 인물들이며 언해본에 실린 인물은 최누백, 김자강, 유석진, 윤은보로 고려중기부터 조선초기의 사람들이다. 이 네 명의 효자는 이후 조선시대 효자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들의 효(孝)는 모두 부모의 죽음을 앞두거나 직후의 상황에서 생긴 일들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부담스럽기만한 미담일 수 있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패륜이 심심찮은 요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아버지를 잡아 먹은 호랑이를 잡아 뱃속을 가르고, 장례를 치렀다는 일화를 소개한 ‘누백포호’를 묘사한 삼강행실도의 그림.
◆누백포호(累伯捕虎·최누백이 호랑이를 잡다)


최누백은 고려 때 수원의 관리 최상저의 아들이다. 최누백이 15살 때 아버지가 사냥하다가 호랑이에게 해를 당해 죽었다. 최누백은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잡으러 도끼를 메고 호랑이의 자취를 따라갔다. 호랑이는 이미 아버지를 다 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는데 바로 앞에 달려들어 “네가 내 아버지를 해쳤으니 내 너를 먹으리라!” 하고 꾸짖으니, 범이 꼬리를 내리고 엎드렸다. 최누백이 도끼로 내리쳐 호랑이의 배를 갈라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어 그릇에 담고, 호랑이의 살점은 항아리에 넣어 시냇물 속에 묻었다. 이후 아버지를 홍법산 서쪽에 장사 지내고는 여묘살이를 하였다.

◆자강복총(自强伏塚·김자강이 무덤에 엎드리다)

조선 성주 사람인 김자강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섬기되 뜻을 잘 받들고 어김이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고 한결같이 유교적 가례(家禮)를 따랐다. 아버지 묘와 합장하고 3년을 여묘살이하고 나서 또 그 아버지를 위해 3년을 여막에 있으려 하거늘 처족(妻族)이 여막에 불을 질렀다. 김자강은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고 땅을 치며, 다시 여막으로 돌아가 무덤 앞에 엎드린 채 사흘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유석진이라는 사람이 손가락을 잘라 아버지의 병을 치유했다는 내용을 담은 ‘석진단지’
◆석진단지(石珍斷指·유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


유석진은 조선 고산현의 아전이다. 그의 아버지는 몹쓸 병에 걸려 날마다 발작하다가 기절했는데, 차마 그 광경을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유석진은 밤낮으로 아버지를 곁에서 모시면서 약을 구하였다. 그러던 중 어떤 이가 “산 사람의 뼈를 피에 섞어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하여 유석진이 즉시 왼손 무명지를 잘라 그 말대로 하였더니, 그 병이 곧바로 나았다.

◆은보감오(殷保感烏·윤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

조선 지례현에 살던 윤은보와 서즐은 그 고을 사람 장지도에게 글을 배웠다. 그들은 스승을 자기 아버지처럼 섬겼다. 장지도가 죽자 두 사람이 자신의 어버이에게 허락을 받아 검은 삿갓에 상복을 입고 무덤 옆에 살면서 몸소 밥을 지어 올렸다. 윤은보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자 은보가 아침저녁으로 통곡을 하고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장사를 지낸 뒤 아버지의 무덤에서 여막살이를 했다. 하루는 거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쳐 향합(香盒)을 잃어버렸는데, 수개월 만에 까마귀가 무엇을 물고 날아와 무덤 앞에 두거늘 바로 잃어버렸던 향합이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이면 여전히 스승 장지도의 무덤에 제사 지내고, 서즐 또한 거기서 여묘살이 3년을 마쳤다.

백영빈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연구원
◆효의 본보기가 된 자식들의 용기와 희생


소개한 네 가지 이야기는 본보기가 되어 조선시대 행실도의 주축을 이루며 유행하였다. 김자강의 사례는 ‘주자가례’에 따라 시묘살이를 한 조선시대 효의 상징으로 보았다. 윤은보뿐 아니라 서즐이 함께 스승을 위해 상을 치렀다는 기록은 이후 스승을 복상(服喪)한 전례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호랑이를 죽이는 기개를 보인 최누백이나 병환 중인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병구완을 한 유석진의 효도란 조선시대 사람들도 감히 따라하기도 어렵고,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유교적 사유가 지배한 조선시대에 백성들에게 주입하던 ‘효’의 모범 사례 중 특히 이해하기 힘든 단지(斷指)는 705건 중 186건으로 26%에 달한다.

◆‘사람답게’ 사는 법에 대한 고민

여기서 지난 시대를 돌이켜본다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묻게 된다. 당시의 효자들은 나라에서 주도한 ‘효도 프로젝트’에 가담하여 가문의 영광과 포상을 목적으로 자신의 몸을 자르며 죽음을 무릅썼을까. 조선시대 내내 행실도를 그림으로 보고 한글로도 쉽게 읽어가며 주입됐던 ‘삼강행실도’가 지금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부모된 이들이 “자기 손가락을 잘라 부모를 공경한 자식도 있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인가”라고 자식에게 호통 치라는 말인가. 또 자식은 “저런 효자도 있는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라며 자괴감에 빠져야 하는가.

‘부자자효’(父慈子孝)라고 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으로 기르며, 사랑받고 자란 자식은 부모를 사랑한다. 조선시대의 행실도는 대체로 부모의 사랑은 넘치고 자식의 사랑은 부족하다는 점에서 ‘부자’(父慈)보다 ‘자효’(子孝)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자효를 강조한다. 넘치고, 모자라는 것 모두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의 지혜로운 사랑이 서로 통해야 한다는 메시지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내용이 자극적이거나 다소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삼강행실도는 세종대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효의 의미를 백성 전체에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출판됐다. 최근 심심치 않게 엽기적이고 잔혹한 패륜 소식을 접하곤 한다. 또한 힘없는 아이들에게까지 저지른 만행을 접하며 자효(子孝)는 어디에 있고, 부자(父慈)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게 된다. 최누백이나 유석진의 행동을 보며 ‘효’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으로 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가 고민이 깊어진다.

백영빈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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