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조상들이 덕을 쌓았다면 쇠락한 가문도 부활하리라

입력 : 2016-09-05 10:39:33 수정 : 2016-09-05 10:39:32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한국사의 안뜰] 〈11〉 신선이 점지해 준 인연의 숨은 뜻은
매일 아침을 열 때 현대인은 신문, 방송과 사이버 세계에서 범람하는 뉴스와 이야기들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이야기 속에서 단어의 이면에 담겨진 또 다른 의도나 배경을 읽을 줄 알아야 훌륭한 시청자와 독자로 인식된다. 이처럼 이야기를 둘러싼 작자와 독자의 암호와 해석의 관계를 알게 해주는 사례가 조선시대에도 많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발굴한 이야기 한 사례를 읽어 보자.


#분재기에 남겨진 암호

“…너의 아비에 이어 너도 급제하고, 여러 숙부들이 또한 잇달아 과거에 오르니 이것은 정말 쇠락한 가문 [衰門]의 큰 경사이구나! 네가 장손으로 어린 나이에 대과에 급제한 것은 조상들이 쌓은 덕 [積善]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1657년(효종 8)에 정효준이 손자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는 분재기. 문서의 후반부에 정승과 판서가 증인으로 참석한 기록이 보인다.

이 글은 조선시대에 재산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분재기의 서문이다. 분재가 이루어지게 된 표면적인 배경은 정효준(1577~1665)이 손자 정중휘(1631∼1697)의 과거급제에 대한 기쁨을 표현하는 데 있었다.

정효준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무엇일까. 몇 가지 단어가 눈에 띈다. 그것은 ‘쇠문(衰門)’과 ‘적선(積善)’으로, ‘쇠락한 가문’ 및 ‘조상들이 쌓은 덕’과 같은 표현이다. 이들 단어의 의미는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증인으로 이름을 올린 삼정승과 육조판서들을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에게 아마도 정확하게 전달되었고 또 판독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정효준의 초상화(오른쪽). 그는 조상들이 쌓아둔 덕으로 죽은 단종의 도움을 받아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 가문을 일으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선이 알려준 실마리


“어느 날 밤 꿈에 문 밖이 소란하여 밖으로 나가 보니 한 젊은 신선 같은 어린 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집 안으로 거둥했다. 정효준이 급히 맞이하여 엎드리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는 조상을 받들고 나도 또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언제까지 홀아비로 지낼 수 있겠느냐. 빨리 장가들도록 하여라. 이 사람은 너의 아내가 될 귀인이니 자세히 보아두어라. 반드시 너의 집을 복되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정효준이 머리를 들고 보니 보랏빛 옷을 입은 한 규수[紫衣夫人]가 공손히 서 있어 넋을 잃고 바라보다 잠이 깼다.”

‘한거만록’에 수록된 정효준과 관련된 일화다. 이 이야기는 18세기 초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있던 이야기를 모은 책에 수록된 여러 흥미 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 정효준이 신선으로부터 배필을 점지받고 집안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정효준은 누구이며 또 자의부인(紫衣夫人)은 누구인가. 정효준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실업자에다가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이었다. 그것도 이미 두 번이나 부인을 먼저 떠나보낸 안 좋은 조건은 다 갖추고 있었다. 삶이 고난이었던 그에게 유일한 위안은 가까이 살던 친구 이진경을 만나 바둑으로 소일하는 것이었다. 이날도 바둑을 두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마침 꿈에 신선 같은 어린 왕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신선이 소개해 준 보랏빛 옷을 입은 규수, 자의부인은 다름 아닌 이진경의 어린 딸이었다. 이튿날, 정효준은 친구를 찾아 꿈 이야기를 전했으나 격노한 친구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진경의 딸 전의이씨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를 찾아와 자신도 그와 같은 꿈을 꾸었다고 고백하며 혼인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이로서 그 어려운 혼사가 성사되었다.

나이 40이 넘어 신선이 점지해준 꽃다운 부인을 배필로 맞이한 정효준에게는 이제 꽃길을 걷는 일만 펼쳐져 있었다. 혼인을 하자마자 과거에 급제한 것은 물론 내리 아들 다섯을 얻었던 것이다. 이러한 놀라운 일은 모두가 신선이 ‘신세진 것’에 대한 보답으로 정효준에게 배필을 점지했기 때문에 촉발된 것이었다. 여기서 정효준을 비롯한 그의 조상들이 신선에게 베푼 ‘적선’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적선’의 내용은 어떤 것이었는가. 이야기는 정효준의 6대조 정종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종은 조선 초기 문종의 외동딸이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강제로 빼앗자 단종을 보호하려다 역적으로 몰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정종의 유복자 정미수(1455∼1512)는 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은 물론 외숙모 정순왕후의 분묘를 문중의 선산에 마련하고 외삼촌 단종의 제사도 정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후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정효준에 이르기까지 5대 150년 동안 제사를 계승했던 것이다. 정효준의 꿈에 ‘신선 같은 어린 왕’으로 나온 단종에게 있어 ‘적선’으로 진 신세는 다름아닌 제사를 받아먹었다는 데 있었다.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쇠락한 가문을 일으킨 적선과 다섯 용(龍)


신선 단종은 전의이씨에게도 현몽하여 정효준을 배필로 점지해 주고 떠나면서 ‘옥구슬’ 다섯 개를 그녀의 품에 안겨주었다. 정효준과 전의이씨 사이에 태어난 다섯 아들은 곧 신선이 준 선물을 의미했다. 다섯 아들이 태어났다. 옥구슬 다섯은 곧 아들 다섯을 의미한 것이었다. 그리고 단종이 숫자 ‘5’를 택해 보은한 것도 그 ‘신세’인 제사를 받아먹은 것이 정미수에서 정효준에 이르는 5대였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제 이 다섯 아들이 쇠문(衰門), 즉 쇠락한 가문을 일으켜 옛 영광을 되찾는 바로 그 주인공이 되었다.

다섯 아들, 즉 정식(1615∼1662)을 비롯한 오형제는 젊은 나이에 모두 대과에 당당히 급제하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642년(인조 20)부터 1652년(효종 3)까지 10년 동안 계속해서 등용문(登龍門)에 들면서 가문 굴기의 기운을 세상을 향해 뿜어냈다. 이를 계기로 오형제는 다섯 용, 즉 오룡(五龍)으로 일컬어졌으며, 급기야 예조판서 김수항(1629∼1689)의 요청에 따라 아버지 정효준의 벼슬이 승급될 정도로 조정과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제 쇠락한 가문이 옛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다.

장서각에 소장된 ‘장릉봉릉도감의궤’에 묘사된 청룡(왼쪽). 장릉봉릉도감의궤는 조선에서 ‘충효의리’ 아이콘인 단종의 능을 보수한 기록이다.
정효준이 분재기에서 언급한 쇠락하기 전의 옛 영화는 어느 정도였을까. 다시 그의 6대조 정종에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정종은 부인이 공주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도 문종의 동생이자 세종대왕의 아들 영응대군과 혼인했다. 이들의 혼사는 모두가 세종대왕이 주선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중요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종의 고모부는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이었고, 그의 할아버지 정역(?∼1425)은 태조 이성계의 절친한 친구였다. 정리하자면 정효준 선대의 옛 영화는 바로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명문가라고 하는 점, 그런 영화를 누렸다는 사실이었다.

정중휘의 과거급제를 축하하는 분재 자리에 조정의 중신들이 모인 이유가 짐작이 된다. 여기에는 단순히 많은 과거급제자를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왕실과 피를 나눈 뼈대 있는 역사를 지닌 해주정씨 가문이라는 점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정효준이 ‘충효의리’를 상징하는 조선의 아이콘 단종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가치를 품고 있는 가문이라는 권위를 의미하기도 했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던 분재기에서 정효준이 전달하려던 메시지는 분명했다. 해주정씨 가문이 조선 초기 왕실과의 혼인이 있었던 명가라는 사실을 ‘쇠락한 가문’으로 표현하고, 동시에 자신의 가문이 조상대대로 단종 부부의 제사를 받들어 의리를 지켰다는 점을 ‘조상들이 쌓은 덕’으로 암시했다. 조선시대에 널리 회자되던 이야기와 문서 속에는 이처럼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암호로 숨겨져 있다.

정수환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