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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 옛 사람들의 이채로운 상속

입력 : 2016-07-01 22:00:49 수정 : 2016-07-01 2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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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하사한 책·여생 보낸 정자 ‘참된 임자’에게 물려줘
곽재우가 후세 사람들까지 향유해야 할 문화공간으로 전해지길 바라며 ‘어진 이’를 선택해 물려주었다 하여 ‘망우정’(忘憂亭)은 ‘여현정’(與賢亭)이라는 별칭을 갖게 됐다. 망우정과 유허비(왼쪽), 망우정·여현정 현판(오른쪽).
# 지적(知的) 자산의 상속, 이관징과 이만부

숙종 때 이관징(1618∼1695)이란 능력과 덕성을 겸비한 고위 관료가 있었다. 그는 고관을 지낸 서울의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자란 명문가 자제였다. 학식과 문장 또한 걸출해 문과에도 거뜬히 합격하여 형조판서에까지 올랐고, 평생을 일관한 화합과 포용의 리더십은 당쟁의 격랑 속에서도 ‘완인’(完人·완벽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이유가 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복인이었던 이관징에게도 남모르는 고충은 있었다. 그것은 ‘학자 콤플렉스’였다. 이관징은 호학의 자품을 타고 났음에도 무려 40년 세월 동안 벼슬살이를 하느라 학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여러 아들들 또한 문장으로는 저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준재로 성장했지만 ‘학자’를 희구했던 그의 마음 속 갈증을 가셔주지는 못했다. ‘학자집안’을 향한 이관징의 여망은 이제 손자들 몫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이관징에게는 10명의 손자가 있었다. 명문가의 자손답게 모두 문학·예술 등 다방면에서 두각을 드러냈는데, 이 중에서도 이관징이 가장 눈여겨본 것은 작은 손자 만부였다. 만부는 천품이 준수한 데다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 열정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완성과 조선의 학술문화적 품격의 고양을 지향하는 것이었기에 진정성과 감동이 있었다. 하지만 만부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처럼 관료의 길을 걷기를 바랐고, 틈만 나면 과거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만부는 작심하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과거를 포기하고 학자의 길을 걷겠다는 ‘자율적 진로 선언서’였다. 그랬다. 만부가 갈망했던 것은 부화(浮華)한 영예가 아니었다. 그는 고요한 곳에서 독서하며 ‘인간답게 사는 법’을 체득하고자 했고, 나아가 자신의 공부가 ‘세상을 보다 풍요롭게 했으면’ 하는 원대한 뜻이 있었다. 집안의 사환 전통을 거부하는 아들의 편지에 아버지는 몹시 실망했지만 할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이관징은 손자의 사려 깊은 결단에 감동했고, 크고 작은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훈계의 글을 써주면서 손자의 학문적 대성을 기원하였는데,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마음은 장서각에 소장된 ‘선훈경수첩’(先訓敬守帖), ‘정하음휘’(庭下音徽)란 서첩에 알알이 맺혀 있다. 

만부는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명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나갔고, 그런 만큼 할아버지의 마음도 날로 뿌듯해졌다. 이 무렵 이관징은 무언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그것은 서책의 분재였다. 이관징의 서가에는 사서오경을 비롯하여 ‘계몽익전’(啓蒙翼傳) 등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서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정상대로라면 맏손자에게 가야 할 것이었지만 이관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책은 ‘참된 임자에게 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고, 그가 보기에 임자는 작은 손자 만부였다.

마음의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는 만부를 불러 숙종 임금께서 내리신 사서오경을 비롯한 귀중본 서책들을 아낌없이 전해주었다. ‘책의 분재(分財)이자 지식의 상속’은 이렇게 이루어졌고, 만부의 사명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바람과 당부는 결코 빗나가지 않았다. 만부는 일생 처사로 살며 걸출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고, 류성룡의 증손녀와 혼인하여 상주로 낙향해서는 서울과 지방의 학술문화적 소통의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로써 이관징의 꿈은 소담스런 결실을 맺었는데, 그 결실의 진짜 수혜자는 18세기 조선 사람들이었다.

이관징이 이만부에게 준 사서오경 가운데 하나인 ‘논어’는 1693년 이관징이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다. 이만부 종가에서 대대로 소장하던 것을 현재는 장서각에서 관리하고 있다.


# 홍의장군 곽재우의 비범한 분재

백마를 탄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잘 알려진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는 백전백승의 전공만큼이나 인생관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말년에 은거에 들어가 1602년에는 영산 창암(蒼巖)의 낙동강변에 강정(江亭)을 지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망우정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생식(生食)하며 흡사 도인과 신선처럼 여생을 보내다 1617년 4월 10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망우정은 곽재우의 비범했던 행적만큼이나 증여 과정이 남달랐다. 여느 사람들처럼 곽재우도 자신의 강정이 길이 보존되기를 갈망했지만 방법은 사뭇 달랐다. 그는 진정 산수를 즐기고, 또 능히 이것을 수호할 수 있는 ‘어진 이(賢)’에게 정자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이는 곽재우에 있어 망우정은 사물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까지 향유해야 할 사림의 문화공간이었고, 그 이면에는 세월이 흘러 주인이 바뀌어도 자신의 정신만큼은 올곧게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두 아들과 여섯 손자를 제쳐두고 영산의 선비 이도순(李道純, 1585∼1625)을 적임자로 지목하게 된다. 

선훈경수첩(先訓敬守帖). 이관징이 이만부에게 직접 써준 선대의 가훈이다.
“내가 보기에 강상에 들어선 정자들 가운데 잘 수호되는 것이 드문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어진이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 정자를 사사로운 재물로 여기지 않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그대가 산수를 즐기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나의 정자를 잘 수호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군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진이를 얻어 이것을 넘겨주고, 뒷날의 어진이 또한 군과 같은 마음으로 수호할 만한 어진이에게 전수한다면 길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곽재우 ‘망우집’권2 ‘망우정을 이도순에게 증여하는 글’)

곽재우의 정신이 담긴 이 글은 사림의 고사이자 미담이 되었고, 주변에서는 그의 ‘택현증여’(擇賢贈與)를 기려 망우정을 ‘여현정’(與賢亭)으로 부르기도 했다. 개인의 사물일지라도 공공성이 있다면 사회적 차원에서 상속을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곽재우가 여느 선비들과는 구별되는 이유였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망우정을 자손이 아닌 타성의 ‘어진 이’에게 전했을 때 곽재우의 특별한 재물관은 온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특별한 재물관은 비단 여기에 국한되지 않았다.

곽재우에게는 1576년생과 1582년생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은 임진왜란 전에 시집을 보냈으므로 혼수도 꼼꼼히 챙겼고, 사위 신응(辛膺)에게 보너스도 두둑히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 딸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곽재우가 창녕 땅에 살던 성이도(成以道)라는 선비를 둘째 사위로 삼은 것은 임진왜란 직후였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
이 무렵 곽재우는 많던 재산을 전비(戰費)로 다 써버린 탓에 남은 자산이 별로 없었다. 당시의 풍속을 고려할 때, 사위를 맞으면 별급이라는 형식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곽재우에게는 그런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성이도는 외모가 훤칠하고 성정도 맑고 곧아서 곽재우의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든 곽재우는 다른 방식으로 둘째 사위를 격려하기로 작정하고 진심을 다해 편지를 썼다.

“둘째 사위 성이도에게: 세상 사람들은 새로 맞은 신랑의 모습이 수려하고 가무를 잘하는 것을 보면 의례히 노비나 전지를 별급하지만 나는 난리를 겪은 뒤에 노비들의 대부분이 굶주려 죽고 말았다. 한두 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아들과 딸에게 모두 나누어 준 탓에 한 구도 별급할 것이 없다. 전지의 경우 그 좋던 밭과 땅들이 이제는 황무지가 되었는데, 농사를 짓고자 한다면 금하지는 않겠지만 별급할 수는 없다. 대신 한마디 말로써 평생을 쓸 물건으로 삼게 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비록 세속에서 주는 재물과는 다른 것이기는 해도 옛사람들이 보배롭게 여긴 것이다. 독서에 부지런하고, 자신을 유지함에 신중하며, 효로써 부모를 섬기고, 충으로써 임금을 섬기면 행세함이 있어 노비 천백 구보다 만배나 가치로울 것이니, 내가 주는 것이 또한 크지 않겠느냐? 부디 자네는 이 말을 가슴에 새겨 잃어버리지 말지어다.”(곽재우, ‘망우집’ 권2, ‘사위 성이도에게 주는 글’)

그랬다. 곽재우는 사위에게 재물 대신에 ‘근신충효’(勤愼忠孝)의 가르침을 상속했던 것이다. 이 가르침은 하나의 약석(藥石: 정성으로 훈계하는 말)이 되어 성이도를 곧고 바른 선비로 성장하게 했다. 성이도가 90 평생을 사는 동안 조금의 구차함이 없는 삶을 유지하고, 중년 이후 잣잎을 먹으며 선가의 풍도를 드러낸 것도 곽재우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성이도는 만강(萬江), 만하(萬河), 만파(萬波), 만류(萬流), 만형(萬?) 등 모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 자손들 모두 영남의 선비문화를 주도하는 엘리트로 성장했으니, 곽재우의 가르침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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