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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아 자위, 경악할 일 아닙니다

입력 : 2016-06-12 15:32:29 수정 : 2016-06-17 19: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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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시절 성에 대한 나의 인식은 처음 생리를 했던 날의 기분과 같았다. 나는 수치심에 가까운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침에 엄마가 “너 혹시…”라고 물었을 때 뒷말을 듣기도 전 “아니야”라고 외쳤다. 결국 엄마가 생리대를 들고 중학교에 찾아왔고 마지못해 받았다.

어린 시절 “아기는 어떻게 생겨?”라고 물으면 엄마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남자랑 여자가 만나 신에게 기도하면 아기가 생긴다”고 했다. 제법 그럴 듯하게 들렸지만 이 대답은 후유증을 남겼다. 나는 남자들이 사용한 변기에 엉덩이를 댔다가 아기가 생기면 어찌하나는 무지몽매한 망상에 시달렸다. 기도와 같은 ‘생각만으로’ 아기가 생긴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꼈다.

내 주변에서 부모와 성에 대해 담담하게, 자유롭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교육열로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한국 부모들이지만 ‘성교육’ 만큼은 예외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학교나 친구, 대중 매체를 통해 스스로 깨우친 다음, 부모 앞에서 ‘섹스가 어쩌고’ 하는 불편한 화제를 꺼내지 않는 게 자식의 미덕이 아닌가. 이러한 문화에 비판적이었던 대학 친구는 중학생이 된 남동생에게 “너 몽정은 해봤냐?”고 물었다가 “내가 저 X 때문에 못 산다. 동생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라는 엄마의 비난을 들었다.

나는 성에 대해 담담하게 대화하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지난해 엄마들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글을 보고 ‘성에 열린 엄마’, ‘준비된 엄마’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한 자신임을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성교육을 초등학교나 중학교 입학 이후의 일로 생각했다.

“딸이 4살인데 자위를 해요.” 글쓴이는 어린이집 교사로부터 아이가 다리 사이에 베개를 끼고 자주 끙끙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미치겠다. 창피하다. 민망하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며 성토를 했다. “쥐구멍에 숨고 싶을 정도로 얼굴이 화끈거렸다”고 했다. 집에서 유사한 행동을 하면 “그러면 안 돼!!”라고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올바른 훈육이 아닌 것 같다며 조언을 구했다.

‘유아 자위’라는 단어에 나는 흠칫 놀랐다. 유아와 자위라니,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보였다. 4살 아이가 다른 성에 대한 호기심 넘어 자위라는 적극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런 자신을 보며 ‘나도 어쩔 수 없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관련 내용을 찾아보니 유아 자위는 희귀한 사례나 특이한 행동이 아닌 정상적인 발달 과정이었다. 전문가들은 성과 관련된 아이의 질문이나 행동에 부모가 화들짝 놀라며 예민하게 반응하면 아이에게 성에 대한 부끄러운 인식이 생길 수 있으니 주의하라고 했다.

나는 내 아들이 자신의 성적 호기심과 남성으로의 변화를 은밀한 것,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는 것,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소중한 것’으로 여기길 바란다. 성기를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소중하기 때문에 더러운 손으로 만지거나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고, 이를 만지거나 보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면 부모에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유아 자위’에 대한 다른 엄마의 글은 고민거리를 안겼다. ‘난 어느 수준까지 아이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아무리 열린 대화를 지향한다해도 성을 쉬쉬하는 문화에서 자란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리버럴한’ 유럽인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독일에 사는 소꿉친구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는 ‘한국 엄마’인 자신을 자각했다. 친구가 아는 독일인 가정에서 어느 날 어린 딸이 가랑이 사이에 아빠의 한쪽 다리를 넣고 문지르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 아이가 베개를 이용했다면 이 아이는 아빠의 다리를 사용한 것이다. 혀를 차며 뒷목 잡을 일이었다. 그런데 독일인 아빠는 딸에게 “네가 그러면 아빠가 움직일 수 없어 불편하다”며 “정 그러고 싶으면 다른 데서 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친구와 나는 “다른 데서 하라니, 대박…, 대단하다 대단해, 쿨한 것도 정도가 있지”라고 혀를 차면서도 “그런 사고방식이 한편으로는 부럽다”고 말했다.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담담할 수 있을까. 일련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나는 내 안에 ‘생리를 부끄럽게 여겼던 여자애’와 ‘이성을 앞세우며 열린 대화를 지향하는 30대 여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앞으로 아들은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 “정자와 난자가 뭐야? “그게 어떻게 만나?”와 같은 질문을 하며 왕성한 호기심을 보일 것이다. 통계적으로 여자 아이들의 유아 자위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 자위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애들이 고추를 살짝살짝 만지며 기분 좋다고 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아이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날을 생각하면 솔직히 곤혹스럽다. ‘친구 같은 엄마가 되야지’라는 강박관념에 민망한 대화를 굳이 시도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든다.

하지만 청소년기에 임신의 진실을 알고 나서 내가 느꼈던 당혹스러움, 불쾌감, 민망함, 부모에 대한 어색함 등을 떠올리면 내 아이는 해당 사실을 좀 더 건강하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성에 대한 적나라한 대화는 외설이겠지만 적절한 대화는 ‘교육’이 아닐까. 나는 부모에게 그런 교육을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나 외부 전문가, ‘야동’에 교육을 미룰 일이 아니라.

아이가 머리 굵은 청소년이 됐을 때 “성관계는 사랑하는 사람 간의 친밀한 행위야. 다만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피임 같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해야 해”라고 말하는 엄마가 되고 싶다. 아들이 첫 몽정을 했을 때 엄마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며 속옷을 감추는 소년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서구의 자유분방함을 예찬하려는 게 아니라, 성을 뒤에서 알아서 배우게 하며 더욱 은밀하고 야릇한 것으로 만드는 한국의 엄숙주의 문화를 젊은 부모들이 바꿔나갔으면 한다.

국제부 기자 engine@segye.com
사진=게티이미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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