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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건축은 시간과 이야기로 들어가는 문

입력 : 2016-05-13 10:00:00 수정 : 2016-05-12 21: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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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문
속초 도문동 주택. 하나의 땅에 세 채의 집이 마치 산봉우리처럼 땅 위에 불쑥불쑥 솟아올랐다.(사진: 박영채)
# 속초 도문동, 도(道)로 들어가는 문(門)

속초는 모두 알다시피 동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이자 설악산에 안겨 있는 도시이다. 그래서 큰 바다와 큰 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고, 태양도 강렬하고 바람도 강렬하며 모든 색들이 스스로를 거침없이 드러내는 곳이다. 언제 보아도 바다는 방금 닦은 자동차 유리처럼 깔끔하고 산뜻하다. 또한 산도 자존심이 무척 강한 모습으로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을 듯한 자세로 목을 세우고 꼿꼿하게 서 있다.

나는 그런 속초가 무척 좋다.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지만 틈나는 대로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그곳으로 달려가곤 했다.

어느 날 속초에 집을 짓겠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얼굴에 꼼꼼함이 촘촘히 박혀 있었지만 무척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만나자마자 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선뜻 일을 맡고 집지을 땅을 보기 위해 곧바로 속초에 갔다. 집을 지을 곳은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길 변에 있는 도문동이라는 오래된 동네 안에 있었다.

도문동은 도(道)로 들어가는 문(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라 때의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설악산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홀연히 크게 깨달아 ‘도통의 문’이 열렸다 하여 ‘도문(道門)’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한다. 수도승들이 도를 닦기 위해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집터에 있던 옛집은 추운지방 고유의 주거형태인 겹집으로 강원도 식보다 함경도 식에 가까운 일자집이었다. (사진: 박영채)

집지을 곳은 무척 넓은 땅이었다. 그리고 한 구석에 열 평 정도 되는 낡은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집은 외장을 회벽이 아닌 나무 널로 둘러 다른 집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안은 밭 전(田)자 모양으로 방을 겹쳐 놓은, 추운지방 고유의 주거형태인 겹집으로 강원도 식보다 함경도 식에 가까운 일자 집이었다.

오래된 나무 외장은 세월이 쌓여 멋지게 변색이 되어 있었고 언제 얹은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녹슨 철판지붕은 낡았지만 집과 한 몸이 되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비가 샌 흔적도 없었고 기울거나 썩은 곳이 거의 없어 조금만 손을 보면 당장이라도 들어가 살아도 될 정도였다.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그 집은 등기가 없어 지어진 연도를 알 수 없고 사람이 산 지도 너무 오래되어 헐어버릴 생각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집의 상태에 대한 의견을 말하고 한 번 고쳐보자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주차장 터가 될 뻔했던 오래된 집은 일단 살아남게 되었다.

# 도문동 작은 집에서 100년의 시간을 복원하다

우선은 집의 내력이 궁금했다. 보통은 집을 둘러싸고 있는 내부 벽이나 천장을 뜯어내다 보면 타임캡슐을 묻어놓듯이 대들보에 집을 지을 때 써놓은 상량문이 나오곤 한다. 기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그 집을 지은 연대와 정보를 알게 되는데, 이 집에는 상량문도 없었고 어디에도 집의 연대를 추정할 단서가 없었다. 다만 뜯어낸 벽지 속에 초배지로 사용했던 다양한 시간의 오래된 신문들이 불쑥불쑥 나오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지나가다가 문득, 여기서 자기가 태어났으며 이 집은 약 100년 전 설악산 울산바위 근처 암자에 있던 요사채를 옮겨와 지은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집은 알고 보니 100년이 훨씬 넘은 집이었다. 우리의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렇다고 무엇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외장을 조금 손보고 변형된 곳을 원형으로 복원하는 정도로 간단히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쉬울 듯 쉽지 않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고쳐진 집에는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고, 대청 시렁과 안방 시렁 위에 성주신이 거할 항아리를 한 개씩 올려놓았다.(사진: 박영채)

이 집에는 두 명의 성주신(집을 지켜주는 가신)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울산바위 앞 암자에서 집을 옮겨 올 때 따라온 성주신이고, 하나는 여기 도문동에 옛날부터 살고 있던 성주신이다. 그런데 암자에서 온 성주신이 위계가 더 높아서 사사건건 도문동 성주신에게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이라고 우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모두 목수의 꿈 이야기이다. 이 집이 100년이 넘은 집이라는 이야기에 자극이 되어 그런 꿈을 꿀 수도 있지 하며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왠지 목수나 집주인이나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마치 현실에서 있었던 듯, 목수가 어느 날 찾아온 성주신들과 새참을 먹으며 진짜로 주고받은 대화인 양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크지 않은 집이라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한 공사가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며 많이 늘어졌고, 그러는 동안 집 주인 내외를 비롯해서 공사를 하는 목수, 현장소장까지 무척 몸이 아팠다. 심지어 공사를 포기할까 생각하고 있던 목수는 어느 날 밤 꿈에서 (사람 좋게 생긴) 도문동 성주신을 만나 집을 잘 고쳐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었다. 그리고 이 공사가 끝나면 자기가 내쫓긴다며, 일을 다 끝내지 말고 조금 남겨 놓으라고 당부를 하며 사라진 후 (장난꾸러기처럼 생긴) 암자에서 따라온 성주신도 방실거리며 와서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잠에서 깬 목수는 약간은 어리벙벙했지만 꿈이 너무 생생해서 성주신이 한 말을 꼭 지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떠나지 말고 일을 잘 마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는 목수의 꿈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전해 듣고, 조만간 꼭 울산바위 앞에 있는 그 암자에 가서 인사를 드리자고 했다. 그리고 집을 다 지으면 마루와 방에 두 개의 신주단지를 모셔 두었다가, 옆에 새로 집을 지을 때 신주단지 하나를 그리로 옮기기로 했다. 아무튼 세상에는 우리는 모르지만, 보이지도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이 무척 많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땅이 가지고 있는 과거를 복원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거의 다 와 가는 시절에 집이 다 고쳐져서 사람들을 모아 고사를 지낼 무렵 그곳에 눈이 무척 많이 왔다. 그리고 그날 밤에 갑자기 어디선가 호랑나비가 들어와서 집안을 맴돌다 하룻밤 머물고 갔다고 주인이 전해주었다.

# 건축, 시간의 문이자 이야기로 들어가는 문

간혹 집을 지을 때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신기한 일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마치 신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혹은 예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겨울밤에 심심풀이로 해주는 이야기처럼 그런 일들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우리 앞에서 쫘~아 하고 펼쳐진다.
새로 설계한 두 채의 집도 원래 있던 집의 모양과 닮고, 집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과도 비슷한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사진: 박영채)

예전에도 지리산에서 집을 지을 때 땅 한가운데 있던 큰 바위를 함부로 옮겼다가 사람이 여럿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 성주신이니 산신이니 하는 전설 속에서나 들어봄직한 직함에 대해 전혀 거부감이 없는 편인데, 집을 짓는 것이나 땅을 만나는 것이나 아주 신기한 인연의 끈이 당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 집도 원래는 헌집을 허물어 주차장으로 쓰고 넓게 남은 땅에 새로 집을 짓는 계획으로 시작되었는데, 집 주인이 우리와 만나며 집을 살리게 된 그 일련의 과정이 단순한 우연의 결과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종종 그런 일들이 생긴다. 가끔 집을 살려내는 일을 할 때마다, 오래된 집에는 아주 복잡하고 깊고 깊은 자아(ego)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보통 집을 짓는다는 것은 건축주와 건축가, 그리고 땅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서로 양보하며 서로 자기주장을 하는 일이다. 삼자의 의견을 조합하고 통합하여 조화롭게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치 아주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일과 같다.

그런데 오래된 집을 고치는 것은 땅과 건축주와 건축가 이외에, 집이라는 또 다른 자아가 끼어들어오는 일이며 방정식은 훨씬 더 복잡해진다. 이럴 때 건축가의 역할은 사이에서 이야기를 듣고 말을 전달하며 종합하여 서로 의가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결과물을 끄집어내는 일이다.

어쨌거나 도문동 옛집은 성주신들이나 주인이나 얼마나 만족했는지 알 수 없지만 말끔해지고 다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청 시렁과 안방 시렁 위에 성주신이 거할 항아리를 한 개씩 올려놓았다. 
남향으로 골고루 햇빛이 잘 들어오도록 일자로 길게 방들과 부엌을 배치한 안채. (사진: 박영채)

이제 새 집을 지을 때가 되었다. 집 주인은 딱딱한 외관에 부드러운 실내의 집을 짓고 싶다고 했다. 직역하면 콘크리트로 외관을 만들고 안에는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이 어떤가 하고 물었다. (우리의 프로세스가 늘 그렇듯) 설계 이야기는 아주 조금 하고 대부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혹은 각자가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서울과 속초를 오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설계라는 것은 건조한 뼈대를 바닥에 깔아놓고 건축주와 건축가, 그리고 땅의 이야기를 뿌려서 생명을 만드는 일이다. 이 일 역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고 그 이야기들이 집을 만들었다.

그러다 옛집을 고치고 겨울을 보내고 나서 건축주는 면적에 대한 생각과 집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막연히 큰 집, 튼튼한 집을 그리던 것이 삶에 적당한 크기와 편안한 재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오더니 어렵게 설계를 다시 하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설계를 두 번 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어찌 되었건 말려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간의 상활을 설명하는 건축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척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 설계한 집은 그 전의 커다란 콘크리트 덩어리가 아닌 원래 있던 집의 모양과 닮고, 집을 에워싸고 있는 산들과도 비슷한 모양으로 완성되었다. 일단 집을 두 채로 나누어 모두 남향으로 햇빛이 잘 드는 집이 되도록 하고, 일자로 길게 방들과 부엌을 배치한 안채와 거실 겸 음악실, 다락을 겸한 사랑채를 배치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땅에 세 채의 집이 마치 산봉우리처럼 땅 위에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집을 짓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나기도 하고 예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만나기도 한다. 시간과 기억의 얼개 위로 인간과 땅의 의지가 얹히며 현재와 미래가 입혀진다. 그런 의미에서 건축이란 아주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구조물이다.

문은 우리를 어디론가 들어가게도 하고 나오게도 한다. 창은 시선이 넘나들고 문은 공간이 넘나든다. 건축은 넓은 의미에서는 어디론가 들어가는 문이다. 그 문은 엘리스의 그루터기처럼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건축은 세상과 가족의 경계, 혹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경계를 넘나들게 해주는 문이다.

가온건축 공동대표·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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