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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살 소년이 겪은 6·25전쟁의 상흔

입력 : 2016-05-05 23:07:24 수정 : 2016-05-05 2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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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회상기-나의 1950년’ 살아가는 일이란 변방에 차출되어 수자리 사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81)의 뇌리에는 각인돼 있다. 언제 어디서 화살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된 전선의 나날이 곧 삶이라는 인식이다. 그는 “삶이란 병정 노릇하는 것”이라는 스토이시즘의 관점을 원용해 “세상살이를 수자리살이로 파악하고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온 삶에 가장 근접한 실감이라고 말한다. 그가 최근 펴낸 ‘회상기-나의 1950년’(현대문학·사진)에서 토로한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과 전쟁을 거쳐온 삶을 3부작으로 완성한 원로문학평론가 유종호. 그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는 역사는 추상적이고 개괄적인 해석과 요약의 줄거리”라며 “역사 교육은 역사적 현실에서 동떨어진 암기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의 교육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라고 강조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일제강점기인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광복과 6·25전쟁을 거쳐 산업화시대와 민주화시대를 지나는 격변의 현대사를 관통한 삶이기에 이러한 인식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역사를 이루는 개인의 세밀한 미시사를 제대로 기록만 해도 그것들이 모여 전체 그림을 이루는 대형 시대의 벽화가 될 수 있다. 그가 ‘나의 해방 전후’와 1951년 1·4후퇴 이후 1년을 그린 ‘그 겨울 그리고 가을’에 이어 이번에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이후 개인의 삶을 세밀한 기록으로 펴낸 것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 어릴 적 경험 가운데서 해방과 6·25가 제일 큰 것이었고 나의 영혼에도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걸 정리하니까 후련한 점은 있습니다. 사실 이 밑바닥에는 자기 경험을 스토리텔링을 통해 정리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데 우리의 과거를 후대 사람들에게도 좀더 정확히 알게 할 의무가 있다는 차원에서 겸사겸사 썼습니다.”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고 견결한 삶을 살아온 유종호는 천재적인 기억력으로도 호가 높은 인물이다. 그는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반찬 가짓수와 살던 동네의 세밀한 지형은 물론 가옥의 구조까지 생생하게 기록해 실감을 돋우었다. 인물들의 대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인 세목이 선명한 만큼 출중한 기억력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들고 행여 소설을 쓰기 위해 메모를 해온 건 아니었을까.

“젊은 시절 소설을 쓰려고 한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답지 않게 소설로 쓴다면 원래 가진 경험의 진정성도 훼손될 뿐입니다. 이태준의 말처럼 작가의 기본적인 능력은 ‘눈치’가 있어야 하고 세상 여러 가지 잡동사니에 통달해야 하는데 나는 세상물정 잘 모르는 사람이어서 애당초 소설은 포기했습니다. 누구나 타고난 재주는 하나씩 있는 법인데 다행히 나는 기억력을 타고 나서 그걸 밑천으로 활용한 거지요.”

충북 충주시에서 전쟁을 만나 그의 가족은 먼 친척이 사는 욕각골이라는 인근 산중으로 피난 가서 충주시내 집을 왔다 갔다 했다. 그 과정에서 인민군이 충주를 점령하여 그들 가족은 후일 꼼짝 없이 부역자의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의 부친이 충주고등학교 교사였거니와 이로 인해 1년간 정직 처분을 받았다. 월급으로만 먹고 살아 모친이 “쌀을 가마니로 들여놓고 살면 원이 없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가난을 살았는데 1년간 월급이 나오지 않아 그가 미군부대에 들어가 노동을 하던 고통은 후속편에 세밀하게 나온다. 이때 “겨우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했느냐”고 큰소리치던 이를 그는 두고두고 미워했다. 3개월이 될지 30년이 될지 모를, 총부리가 앞에 있는 상황에 처한다면 어찌할 것인지 처지를 미루어 짐작한다면 그러한 막무가내의 단죄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국군이 해주를 탈환했다고 허위방송하다 슬며시 가버린 이들이 라디오도 없는 상황에서 인민군 치하에 갇혀버린 사람들을 두고 석 달 만에 만나서 동료 교사에게 고생 많았다고 말하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리 매도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요. 표피적 현실 파악의 천박성보다도 역지사지는 심성의 결여가 문제입니다. 당시 그 말을 했던 사람의 반응은 부역자를 바라보는 이승만 정부의 공식 태도와도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책머리에서 “자기 세대가 가장 불행하고 다난하다는 소회는 널리 발견되는데 이는 극복해야 할 확대된 자기연민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바람 잘 날 없는 반도에서 삶을 영위한 세대치고 고단하고 숨차지 않은 행운의 세대가 어디 있을 것인가? 고해가 지상의 보편적 인간 조건이 아닌가?”라고 물었다. ‘마스막재’ 너머 피난시절 ‘욕각골’을 60여년 만에 찾은 그는 “열여섯의 겁쟁이 사내아이가 여든 고개를 넘는 사이 강은 호수가 되고 고토(故土)의 상징이던 붉은 산은 초목 우거진 산림이 되었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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