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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눈으로 보는 인간성 잃어가는 사회

입력 : 2015-10-10 03:00:00 수정 : 2015-10-10 03: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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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강주헌 옮김/아르테/1만3000원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지음/강주헌 옮김/아르테/1만3000원


20세기를 대표하는 석학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2009)의 유작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가 번역 출간됐다. 레비스트로스는 19세기 서구 식민지배의 논리를 강력 비판한다. 예컨대 ‘문명(선)과 야만(악)의 이분법적 사고방식’ 등이 그것이다.

무엇이 야만적이고 문명적인가. 이렇게 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기술의 발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현재보다 과거는 야만적이다. 이런 논리라면 지금의 핵가족이 과거의 대가족보다 문명화되고 덜 야만적인가. 몽테뉴는 이른바 자기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의 관습에 속하지 않은 것은 야만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흔히 서구의 식자들은 식인 풍습이 과거에는 있었고 현재는 없다고 주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식인 풍습이란 개념이 야만인과 문명인 간의 차이를 과장하려는 목적에서 조작해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양심적인 존재라고 자처하고 신앙에서 우리의 우월성을 확고히 하려고 가증스러운 풍습과 신앙을 야만인들의 것으로 돌려버린다”고 통박한다. “식인종과 미친 소를 관련지어 보자. 소의 뼛가루를 소에게 먹이고 그 소를 도축해 먹는 인간과 식인종이 무슨 차이가 있느냐. 결과적으로 우리는 모두 식인종인 셈이다.”

“인간에서 떼어낸 몸의 부분이나 물질을 다른 인간의 몸에 의도적으로 넣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문제였다. 따라서 사회에서 축출됐던 식인풍습이란 개념이 앞으로 상당히 흔한 현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 결국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가장 가난한 방법은 여전히 타인을 먹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글은 대부분 20세기에 쓰였지만 통렬한 성찰은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도 유효하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의식하든 않든 생명체를 죽여서 영양을 취한다는 사실은 인간에게 철학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육식을 타락의 간접적인 결과로 해석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해와는 채소와 열매만을 먹었다.(창세기 1장 29절) 노아 이후에야 인간은 육식동물이 되었다.(창세기 9장 3절) 인간과 다른 동물들 간의 이런 단절이 바벨탑 이야기 직전에 있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바벨탑 사건은 인간들 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인간들 간의 단절은 앞서 있었던 인간과 다른 동물들 사이의 단절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예컨대 광우병 파동은 자연계를 거스르는 인간에게 돌아오는 대가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오랜 벗이자 프랑스 철학자 카트린 클레망은 그의 사후 유명한 추모글을 남겼다. “레비스트로스가 ‘원시적 사유는 원시인의 사유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원시적 사유’라고 설명할 때 원시인과 우리 사이에 어떤 정신적 기능의 차이도 없어졌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혁명이다.”

책에 실린 시평 중에는 ‘신화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 ‘몽테뉴와 아메리카 대륙’, ‘오귀스트 콩트와 이탈리아’, ‘순환론- 비코 새로운 신화를 통한 증명’ 등 흥미로운 글이 다수 나온다. 그는 고대 철학부터 현대 인류학까지 넘나들며 광폭의 행보를 보인다. 만약 레비스트로스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유럽으로 흘러드는 대량 난민사태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지 궁금해진다. 레비스트로스는 서양 우월주의에 제동을 건 구조주의 인류학자로서 큰 울림을 준다. 이 책은 레비스트로스가 제기한 논점과 시평 등을 16개 테마로 소개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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